삭발과 단식, 그리고 드러눕기
삭발과 단식, 그리고 드러눕기
  • 문틈/시인
  • 승인 2013.10.1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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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독재 시절에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뜻이 훼손되거나 관철되지 않고 부당하게 권력에 짓밟히는 것에 항거하기 위해서 몸으로 대들었다. 그것의 상징적인 모습이 바로 대중 앞에서의 삭발, 단식, 그리고 국회나 관공서 앞에서 집단으로 드러눕기 같은 일종의 퍼포먼스적인 저항 행동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격한 시위 같은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고, 극단적으로는 분신까지도 있었다.
그런 행동들은 민중의 관심을 끌었으며, 저항 에너지를 모으는데 효과적이기도 했다. 헌데 민주화를 달성했다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런 모습은 자주 목격된다. 아직도 민주화가 덜 되었다는 방증이다. 정치적인 민주화가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답은 아닐지라도 그 단초라는 의미에서 민주화는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투쟁의 담금질에 의해 진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그 옛날투의 삭발과 단식, 드러눕기는 보기는 좀 뭣하지만 지금도 유효한 데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대화나 협상, 토론에 의하지 않고 무슨 문제든 사회 각 분야의 불만들이 이런 식으로 몸을 들이대는 극단의 저항 방식은 철 지난 의상을 입고 나온 것처럼 좀 민망한 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무슨 문제든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층, 단체에 불리한 점이 생기면 무조건 몸부터 들이대는 모습은 민주주의가 토론과 합의의 문화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 같아 보기에 썩 좋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최근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하여 야당 대표가 단식 노숙 투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국가경영의 토론마당인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나와서 서울시청 광장에 진을 치고 단식 노숙 투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 내 피는 옛날처럼 뜨겁게 끓지는 않고 있으나 아직도 토론이나 협상이 아닌 몸을 들이대는 식으로 발언을 해야만 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우울하기만 하다.
삭발, 단식, 그리고 드러눕기. 그것은 이제 한국의 투쟁 문화로 정착되어 직장 해고, 임단협 투쟁 같은 일반 사회의 불만이나 주장 관철의 행동으로 민중들도 그런 식으로 곧잘 표시하고 있다. 아예 특정한 장소를 점하고 일 년이 넘도록 공권력과 대치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내가 대통령이라면 그 현장에 가서 직접 불만을 들어보고 다독거리고 싶다. 대통령은 마땅히 민중의 불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사에 대한 협상 압력이든 시위 목적이든 다른 방법으로 표시하는 방법은 없을까. 극단의 방법 말고 말이다.
다른 측면에서 냉정히 보면 이런 현상은 이제 법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을 법하다. 법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서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다. 엊그제 서울에서는 파출소에 붙들려온 사람이 파출소 안에서 상대에게 난장을 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전에는 술취한 사람이 파출소에서 책상을 뒤집어엎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국가 공권력의 첨병인 경찰은 꼼짝도 못하고 당하기만 한다.
공권력에 대한 도전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문제를 법 외의 수단으로 해결하려는 일상화된 풍조가 적이 염려스럽기만 하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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