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⑯ 5월 전사 박래풍과 안통일
5월 단상 ⑯ 5월 전사 박래풍과 안통일
  • 김상집
  • 승인 2013.08.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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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집

영창 안에 용변 보는 문제를 조율하자 졸지에 6소대장까지 맡게 되었다. 동시에 배식과 화장실 청소를 담당할 당번을 정하라고 하길래 박래풍과 안통일을 지명했다. 배식은 비교적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밥을 한 그릇씩 먹을 수 있었다.
내가 박래풍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조사받을 때였다. 조사를 받으려면 “충성 박래풍! 조사받으러 왔습니다.”고 신고해야 하는데 박래풍은 “충성 박래후이! 조사받으러 왔습니다.”고 하는 바람에 조사받을 때마다 작신나게 두들겨 맞는 거였다. 몇 번을 다시 시켜도 “박래후이!”라 발음하곤 했는데 이유를 알고 보니 기가 막혔다.

박래풍은 27일 새벽 도청에서 포박된 채 분수대앞 광장으로 끌려나와 시체더미와 함께 엎어져 있었다. 날이 밝아지고 500MD 헬리콥터가 분수대 광장에 내려앉았다. 생전 처음 헬기를 본지라 엎어진 채 고개를 쳐들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계엄군이 “고개 숙여, 이새꺄!”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그대로 얼굴을 아스팔트 바닥에 쳐박으면서 앞니 두 개가 날아가 버렸다. 앞니 두 개가 없으니 ‘ㅂ’과 ‘ㅍ’ 발음이 나오지 않아 조사받을 때마다 공짜매를 맞았던 거였다.

박래풍의 고향은 영광 신광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박래풍을 희망원에 맡겼다. 답답한 희망원을 도망쳐 나와 순천 여수 등지를 오가다 다시 희망원에 잡혀오기도 하는 등 희망원을 들락거리다 성장한 후에는 어머니를 찾을 요량으로 공용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였다. 마침내 수소문 끝에 화순에 있는 어머니를 찾게 되고 그 때부터 열심히 돈을 모아 공용터미널 한 켠에 200만원을 주고 구두닦이 터까지 장만했다.
그러나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5월 18일 오후 4시경 공수들이 나타나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곤봉으로 패고 반항하면 대검으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박래풍도 구두를 닦다가 공수의 곤봉에 머리를 직통으로 맞아 머리박이 터졌고 구두통도 날아가버렸다.

이때부터 박래풍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투사가 된 것이다. 황금동 아가씨들이 뭉쳐준 주먹밥을 먹고 공수들과 맞서 싸웠다. 21일 공수들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자 곧바로 화순탄광으로 가서 무기고를 털어 총을 들었고 남은 무기들은 시내로 싣고 와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안통일은 소대 안에서 제일 덩치가 컸다. 큰 덩치 때문에 세 숟가락도 채 안되는 밥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수도꼭지의 물만 들이키곤 했다. 더욱이 아직 미성년자였다. 당시 목포역은 5월 항쟁의 집회장소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청년학도와 시민들의 투쟁에 안통일은 기꺼이 참여했다. 목포역 대합실에서 먹고 자며 무장봉기를 주도했고 안철 선배와 함께 집회를 이어갔다. 25일 총기를 반납하고 헤어졌으나 광주가 진압되자 목포역에서 구두를 닦다가 맨 먼저 잡혀온 것이었다.
송기숙 명노근 교수들께서 가끔 “통일아! 너 때문에 통일이 안되어부렀단 말이다.”라며 놀려대기도 하였다. 안통일은 1983년 기노련을 조직하기 위해 전남방직 여공들과 지금의 아내와 박현화 전용호 서대석 김성섭 등과 함께 비금도 명사십리를 방문했을 때 우리를 잊지 않고 2박3일 동안 동네청년들로부터 텐트를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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