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귀를 들어가는 낙타
바늘귀를 들어가는 낙타
  • 문틈/시인
  • 승인 2013.07.3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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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쓰여 있다. 그러면 대체 천국에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다. 일설에는 여기에서 낙타는 본디 ‘밧줄’이라는 단어였는데 비슷한 철자인 ‘낙타’로 잘못 필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야 어쨌든 말씀의 중심은 세상에서 부자는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사는 사람이므로 천국에까지 가서 누릴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낙타는 단봉 낙타와 쌍봉 낙타가 있다. 사막에서 적응하기 알맞도록 진화해서 눈썹은 모래폭풍을 가릴 수 있도록 길고 뻣세게 되어 있으며, 선인장 같은 사막식물도 입 안에 상처를 입지 않고 먹을 수 있고, 발바닥은 걸을 때 눈신처럼 되어 있다.
등에 불룩 솟은 봉에는 사막에서 굶주림에 견딜 수 있도록 물과 기름이 쟁여져 있다. 사막을 건너는 중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여러 날 지나면 그 봉에 있는 물과 기름을 사용하여 다 꺼내먹으면 나중에는 없어지기도 한다.
진화의 법칙으로 낙타의 생김새를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낙타는 사막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그 몸집이 최적화되어 있는 모양새다. 모래폭풍이 이는 모래 사막에서 낙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모래사막 끝을 바라보는 모습은 늠름한 데가 있다.
내 생각에는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250킬로그램이 넘는 몸집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니라 낙타 등에 솟은 바로 이 봉을 두고 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부자는 그 봉에 온갖 부를 담아놓고 저 혼자 꺼내 먹고 살아간다. 게다가 어떤 부자는 봉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봉을 가진 사람도 있다.
성서의 말씀은 그 봉들을 지고 천국문이라고 하는 바늘귀를 들어가면 봉이 바늘귀에 걸려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는 ‘봉’을 여러 개 가진 사람들도 많고, 봉이 없는 사람은 하나라도 차지하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삶의 목표가 봉을 많이 차지하는 것에 있기라도 하듯이.
봉이란 말할 것도 없이 재물, 권력, 명예 같은 것으로 말하자면 세속적인 성공들이다. 그런데 성서는 그런 봉들을 내치고 있다. 그래서 “네 가진 것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에 세리장(稅吏長) 삭개오는 머뭇거린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내 가진 것이 변변치 않지만 다 버리고 따르라면 삭개오처럼 고민 깨나 하게 될 것이다.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과 같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누군들 천국에 갈 수가 있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은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이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요지는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가 천국문을 들어갈 수 없다고 한 말씀은 아닐 것이다. 부정과 비리와 탈세로 쌓아올린 정당하지 못한 부, 부를 가지고서도 남을 돕지 않고 자신만 호의호식하는 공동체 의식이 없는 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정당한 부를 이루고 그 부를 이웃과 나누는 청부라면 왜 천국에 못 들어가겠는가. 낙타가 때로 서로 몸을 부벼대는 것은 낙타의 몸이 사막의 열사보다 더 차갑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 비비고 살려면 봉을 나누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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