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⑧ 서호빈-1
5월 단상 ⑧ 서호빈-1
  • 김상집5.18민주유공자회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6.2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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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집

1981년 4월 출소한 뒤 5·18 1주기를 맞이하여 망월묘역(구 묘역)을 찾았을 때 많은 유족들이 통곡하고 있었다. 그 흐느낌 가운데 내 가슴을 송곳으로 찔러댄 것처럼 전율했던 울음이 있었다.
“누가 내 아들놈 손에 총을 쥐어주었냐아. 왜 내 아들놈 총맞어 죽게 만들었냐아. 내 그놈을 총으로 쏴 죽일란다아.”
윤상원형의 묘 바로 뒤에 서호빈의 묘가 있었다.
26일 저녁 도청 회의실에서 총기 교육 후 잠시 윤상원형을 기다리고 있는데 안경 쓴 젊은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물었다.
“저, 김상집 씨가 아닙니까?”
아니, 이런 상황에서 나의 실명을 부르다니! 나는 깜짝 놀랐다. 분대 편성을 할 때 서로를 알지 못하도록 반드시 0분대 0번으로 호칭하도록 주지시켰는데 어이가 없었다.
“누구신데 그럽니까?”
“저 서호빈입니다.”
그는 전남대 공대생으로 25일까지 집에만 숨어 있다. 양심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오늘에야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면 전두환이 항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일정에 따라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설령 그들이 진압을 하려 해도 우리가 강경하게 저항하면 무자비하게 짓밟지는 못할 것이다.”
잠시 후 기자회견을 끝내고 윤상원 형이 나타났다. 형은 10여 분 정도 70여 명의 시민군들에게 연설을 했다.
“방금 외신 기자회견을 끝내고 왔다.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 전두환 살인마가 우리 부모형제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있다. 오늘도 공수들이 암매장한 시신들을 찾아왔다. 소식을 모르는 행방불명자들이 이미 수천 명이 넘는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우다 비통하게 숨져간 열사들의 숭고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 광주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군이 되고자 여기 모인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우리는 전두환 살인마가 즉각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정치일정에 따라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외신기자들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앞으로 3일간만 더 버티면 전두환은 물러날 것이라고 하더라. 민주정부가 수립될 그 날까지 끝까지 투쟁하자.”
윤상원 형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그가 연설 말미에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시민군 모두가 우렁찬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상원 형과 함께 시민군을 이끌고 도청 1층의 무기고로 가서 시민군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들불 형제들도 이때 무기를 지급받았다, 그런 다음 들불 형제들을 이끌고 YWCA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서호빈과 헤어졌다. 서호빈은 영창 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26일 저녁 무기를 지급했던 시민군들의 대부분을 영창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나 서호빈은 없었다. 영창에 갇혀 취조를 받는 동안 내내 그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어 속으로 꾹 참았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에서는 26일 시민군을 조직하고 무기를 지급하며 총기 교육을 시킨 자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죽은 윤상원 형을 제외하고 도청 지도부가 모두 잡혔는데, 26일 저녁 시민군에게 총기교육을 시켜가며 결사 항전을 유도한 자가 드러나지 않으니, 그를 잡으면 결사항전을 교사한 죄로 반드시 사형을 시키겠다고 공공연히 엄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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