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본 아들의 일기장
몰래 본 아들의 일기장
  • 문틈/시인
  • 승인 2012.12.2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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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대청소를 하는 중에 책장 사이에서 아들의 빛바랜 고교 시절 일기장이 발견되었다. 노트에 볼펜으로 쓴 일기장인데 지금은 장성하여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의 그때 그 시절이 궁금하기도 하여 잠시 훑어보았다. 새삼 모르고 있었던 아들의 고민과 걱정거리를 읽으며 나는 잠시 안타까움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더 잘 보살펴주었더라면 하는 후회도 들었다.
요새는 인권이다 뭐다 해서 학생들의 일기장을 교사가 보지 못하도록 한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부모도 모르는 아이들의 고민거리를 일기장을 들춰보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찮은 것들이 십대 아들에게는 매우 절실하고 큰 고민거리였던 모양이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고민의 경중을 비교 하거나 측량할 수가 없다. 친구들의 왕따로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 나름대로 엄청 절실했던 것이다. 아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왜 세상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공부, 공부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밥 안굶고 평생 살아갈 수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 하시는데 대학이라고 간판을 달았다면 모두 국가에서 인정한 그만한 체제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그렇게 아들은 순진하다고 할까, 시쳇말로 뭘 모르는 아이었던 듯싶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들의 그런 생각에 뒤늦게나마 찬성표를 던진다. 변명 같지만 나는 한번도 공부 잘하라 말해본 일이 없다. 뭐랄까, 사람은 천분을 타고 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신념에서 바른 행실을 지켜보며 그저 아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잘 하도록 뒷받침해주려 했을 따름이다.

일기장엔 이런 고민거리만 쓰여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모두 이쁜 여자애들만 좋아하는데 그럼 이쁘지 않은 여자애들은 다 누가 좋아할까?” 하는 대목도 있다.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일류대학이니, 이쁜 애니 하는 것들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학생과 이쁜 여자애를 좋아하는 애는 극히 소수이며 대다수는 평범한 대학을 나와서 평범한 여자를 만나 살아간다. 바로 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우리가 사는 공동체다.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일류대학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학교, 아이들에게 이쁜 여자애를 강조하는 텔레비전 같은 매스컴을 나는 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멀쩡한 얼굴에 성형수술하는 것도 그런 스트레스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오래 살아보면 알게 될 것이지만 평범한 것이 좋은 것이고, 오래 가는 기쁨이다. 평범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자리다. 남을 자기와 같은 동료로 대우하고 생각하는 것이 평범이다.
아들은 일기장에 그가 쓴 대로 평범한 여자를 만나 평범하게 살고 있다. 부모인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 자신을 들볶으며 일생을 환상에 시달리며 살게 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제 스스로 행복을 찾게끔 그대로 놓아두라. 입시에 떨어졌다고 인생에 떨어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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