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구의 중국이야기-54 제갈공명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제갈촌(諸葛村)
강원구의 중국이야기-54 제갈공명 후손들이 살고 있는 제갈촌(諸葛村)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장
  • 승인 2012.11.0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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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천도호로 가기 전에 건덕(建德)을 지나 난계(蘭溪) 서쪽 18km 정도 들어가면 제갈촌이 있다. 마을 가운데 제갈공명을 모시는 무후사(武侯祠)가 있다. 마을은 온통 태극 마크와 팔괘로 꾸며져 있다.
사천성 성도의 무후사보다 헐씬 오밀조밀하여 보기도 아름답다. 만일 도둑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길을 찾을 수 없어 붙잡힌다는 곳이기도 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가 팔괘형을 드러내어 구궁팔괘진과 일치한다. 제갈팔괘촌의 배치가 기묘하여 미로와 같다.

삼국시대 제갈씨의 활약이 눈에 띈다. 촉(蜀)의 제갈량, 오(吳)의 제갈근, 제갈각, 위(魏)의 제갈탄 등은 모두 그 나라의 대신이나 재상으로서 중임되었다. 제갈근은 제갈량의 친형이고, 제갈각은 아들이며, 제갈탄은 4촌이다.
한 집안에서 각 나라의 지도자들을 배출했으니 이는 천하의 영광이라 하겠다. 제갈 집안의 이런 활약은 당시에서는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은 삼국시대에만 있었다.
이곳의 옛 이름은 ‘고륭(高隆)’이다. 제갈 팔괘촌은 중국 제일의 팔괘로 배치된 마을이다. 마을 전체는 거대한 살아있는 문물이고 중국 옛 마을과 옛 민가가 완전하게 보존된 본보기이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같다.

팔괘촌 입구에는 상가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특산품 구매는 물론 팔괘촌 전통 음식을 맛 볼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모여 있다. 마을 전체의 절대 다수의 사람이 모두 1700여년 전 촉의 재상 제갈량의 후손이다.
온 마을 사람은 거의가 성이 제갈씨이고, 극소수만이 제갈 가족의 성원이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제갈량의 후손은 모두 16,000명인데 제갈팔괘촌 하나에 모여 사는 사람이 1/4이다.
1925년 북벌 전쟁 기간 3일간의 격전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마을에 총알이나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손상됨 없이 안전하였다. 항일 시기에는 일본 군대가 마을 밖의 고륭강의 큰길을 지나면서도 의외로 이 마을을 발견치 못했다.

제갈팔괘촌은 참으로 신묘하다. 가가호호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등을 기대며 종횡으로 난 길들이 통한 듯 막혔다. 외부인이 무턱대고 마을에 들어갔다가는 잘 아는 사람을 따라서 길을 가지 않으면 왕왕 들어가서는 나올 수 없다.
완전하게 보존된 명청시대의 고건축과 문물로 오랜 것은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전이다. 명청시대의 집들이 200여 채에 달한다. 700여년 이래 왕조의 교체, 사회 동란, 전쟁의 난리 속에 얼마나 많은 중국의 명루 고찰, 원림 대각이 전화로 불타고 혹은 전재로 훼손되었는지 모른다.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의 14세손 제갈이가 절강성 수창현에서 현령을 하였다. 그가 절강 제갈씨의 시조이다. 제갈이의 아들 제갈청은 북송 천희 2년 (1018년) 난계로 이사 왔고 제갈청의 아들 제갈승재는 난계에서 10대를 전하고 제갈대사에 이르러 온 집안을 데리고 고륭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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