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 17>호남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2)
<광주전남여성운동사 17>호남 최초의 여의사 현덕신(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11.01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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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YWCA 제 2대 회장 맡은 ‘여의사’

이곳저곳에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있는 계절. 증심사에 위치한 석아정을 찾았다. 이곳은 1930년대 현덕신 여사가 남편 최원순 선생의 병간호를 위해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본래 황해도 출신이었던 현덕신 여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국가를 위해 힘썼던 남편 최원순 선생을 만나 광주로 이주하고 나서 여성 계몽운동과 문맹퇴치에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섰다. 광주 최초 여의사였던 현덕신 여사의 활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신생유치원 설립에 이어 신생보육학교 등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광주 YWCA, 건국준비부인회, 대한부인회 등 다양한 활동으로 많은 여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또한 가난한 부녀자와 어린이 진료에 누구보다 앞장 서 의사 본연의 책임을 잊지 않았다.

여의사 머리 길러선 안 돼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바쁜 나날 속에서 정신없이 생활하던 도중 그녀에게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든 새벽 2시경 한 청년이 찾아와 “저기요! 급한 산모가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라며 왕진을 청했다. 그 소리에 깨어난 그녀는 잠결에 왕진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려는 찰나에 엉클어진 긴 머리를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고치고서 환자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 여사는 불과 몇 분 사이에 임산부와 아이 등 두 생명의 목숨이 꺼진 후에야 도착했다. 그 이후 현 여사는 “의사가 머리 손질 좀 안했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닌데 사소한 일 때문에 한꺼번에 두 생명을 잃게 했다니”라고 자책하고 여의사는 머리를 길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소녀처럼 짧게 잘라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그녀는 평생 동안 특유의 단발머리 모습으로 생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독특한 이미지를 남겨주었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환자를 진찰하면서도 여성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고 보수적인 사상을 깨트리는데 개화사상을 주입시켜줬다.

YWCA 활동에 눈부신 활약상

한편 당시 광주의 YWCA에는 김필례를 비롯하여 양응도·양명순·조경순 등이 주동이 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현 여사는 바로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여성운동을 펼쳐왔다.

그리하여 그녀는 1930년 양응도 YWCA 초대회장에 이어 제 2대 회장직을 맡아 더욱 열성을 띠며 눈부신 활약상을 보여줬다. 이들과 함께 광주 지역에서 여성운동을 펼쳐 부녀자들을 어둠에서 광명으로 인도하는 ‘등불’ 역할을 해왔다.

그러던 도중 1933년 그녀의 남편 최원순 선생이 동경에서 2.8독립선언 참여로 건강을 해친 이후 병세가 악화되자 한 남자의 여인으로써, 부인으로써 맡은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게 된다.

병원 일을 바쁘게 지내는 사이에 남편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증심사 아래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그곳에서 극진히 보살피게 된다. 석아정은 현재 광주시 지정기념물 제 5호로 증심사 초입계곡의 의재교를 지나 의재미술관 건너편 ‘춘설헌’이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증심사 의재미술관 건너편에 위치한 ‘춘설헌’은 본래 현덕신의 남편 최원순의 호를 따서 ‘석아정(石啞亭)’이라는 명칭으로 만든 것으로 이곳에서 현덕신은 8여 년 동안 남편 간병을 해왔다.
▲증심사에 위치한 석아정 기념비
증심사 ‘석아정’에서 남편 간병

본래 석아정은 현덕신의 남편 최원순의 호를 따서 만든 것이다. 당시 YWCA의 회장직을 맡고 있던 현 여사는 남편의 간병을 위해 회장직에서 사퇴를 하고 이곳에서 남편의 간호에 혼신을 쏟았다.

하지만 현재 이곳은 지난 1950년 오래된 집을 허물고 양기와를 얹어 현대식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어 본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주변에 현덕신 여사와 최원순 선생의 혼이 깃들어 있는 건 분명했다.

석아정에서 8년간의 그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지만 애석하게도 최원순 선생은 1936년 7월 6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일생을 끝마치게 됐다. 그때 당시 현덕신 여사의 나이는 40세로 결혼생활 겨우 1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게 됐다.

이후 석아정은 YMCA창립을 이끈 광주 최초의 목사인 최흥종 선생이 이어받아 오방정이라고 불리다가, 다음으로 의재 허백련 선생이 타계 전까지 머물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그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김다이 기자

▲초창기 현덕신 남편인 최원순 호를 따서 만들었던 ‘석아정(石啞亭)’의 현판 모습. 옛 현판은 의재미술관 전시관에 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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