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역사기행 4> 학산 윤윤기선생(2)- 양정원
<근현대역사기행 4> 학산 윤윤기선생(2)- 양정원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2.08.16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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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 기치 내건 역사 터전 이젠 표석만 남아

천포간이학교는 한반도 남단 시골 깊숙이 자리한 학교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기상은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기개가 있었기에 우리가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고 자주독립의 기치를 세워 오늘에 이른 것이리라.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세계 5위의 스포츠강국으로 발돋움한 것 역시 그러한 응축된 힘이 살아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학산 선생과 같은 분들이 있고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정신이 살아 숨 쉬었음이 분명하다.

▲ 양정원터까지 100m가 남아있는 안내 팻말이 도로가에 서 있다.
양정원 기념표석 글씨 보이지 않아 

학산 선생은 천포간이학교에 머물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양정원(養正院)을 세웠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잠시 이동하여 논밭 한 가운데를 지나는 도로에 차를 세웠다. 내리고보니 ‘양정원터’를 안내하는 팻말이 100m를 표시했다. 도로를 따라 한 50여m를 걷고 다시 밭길을 따라 들어가니 ‘양정원터’ 기념표석이 서 있었다.

이 기념표석은 앞면에 양정원의 역사를 소개했고 뒷면에는 당시 양정원의 교사 위치도가 새겨져 있었다. 학산 선생의 교육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표석은 양정원 53돌을 맞아 1992년 4월 12일 그 후학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기념비의 글씨를 제대로 읽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닳아진 것도 아닌데 회색 비석에 글씨를 음각을 해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289-1번지 일대 2천평의 땅은 이곳 지주이며 재산가인 정해룡 선생이 기증했다. 또 학교를 지을 수 있는 목재도 제공해주었다. 양정원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서 민족교육을 펴 우리의 얼과 자주 정신을 심은 역사의 터전이다.

학산 선생은 1925년 장흥 안양공립보통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아 보성 천포간이학교에서 근무하기까지 14년을 보냈다. 당시 일본은 교사 생활 15년이면 일본 천왕으로부터 오늘날의 연금과 같은 ‘은급(恩給)’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받으며 살 수 없다며 일부러 1939년 4월 12일 퇴직했다. 

▲ 기행단은 양정원 표석을 보며 학산 선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글씨가 보이지 않아 손가락을 짚어가며 겨우 읽을 수 있어 아쉬웠다.
보성군 복원해 청소년수련원 사용해야 

그리고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보성군의 학무과에 서류를 내고 허가를 받아 양정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민족자주를 내세우는 역사와 한글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보성군에 제출한 문서에 내세운 형식상의 설립목적은 문맹퇴치, 빈곤타파, 부랑아 수용, 황국신민화 등 4개항이었다.

문제는 네째항이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상황으로는 ‘皇國臣民化’는 사설학원 설립 인허가 심사에 필요한 인허가 필수조건이었다. 하지만 설립 후 양정원에서는 일장기를 달거나 휘호 등을 결코 내걸지 않았다고 제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특히 초부 최기현 선생의 비망록에서는 실질적인 양정원의 설립 목적이 ‘분연입지 후예양육(奮然立志 後裔養育)’이었다고 전한다.

▲ 초부 최기현 선생이 쓴 비망록에 양정원 설립이념이 기록되어 있다.
양정원의 정식 개원은 1년이 지난 1940년 4월 12일이다. 양정원은 교실 2개소, 사택, 교무실, 화장실, 다용도 부속실 등 4개의 독립된 건물과 우물이 있었다. 양정원이 서 있던 뒤쪽으로는 해발 664m의 일림산이 우뚝 서있다.

일행들은 당시 민족자존의 교육현장이 이제는 기념표석으로 남아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것이 밭 한 가운데 있다는 것에 무척 아쉬워했다. 기행단 중 한 분은 “밭두렁을 따라 들어가는 것이 좀 멋쩍었다”면서 “보성군에서 이곳을 관리하거나 아니면 복원을 해서 자라나는 청소년을 위한 수련원으로 사용해도 될 성 싶다”고 말했다. 

일제 감시 피하기 위해 교실 설계 

당시에 야학으로 운영된 양정원은 초등과 중등 과정을 무상교육하면서 보성은 물론 인근의 장흥, 강진, 영암, 완도, 고흥 등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민족혼을 일깨웠다고 전한다. 이곳에 배출된 인재만 해도 2천여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함께 기행단 버스에 올랐던 오연숙(81) 할머니는 양정원 2기라고 말했다. 당시에 연령 제한이 없고 무상교육이다 보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업을 3부제로 운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산 선생께서 어디선가 조선어 교과서를 구해왔고 의약품도 마련해 무료진료를 하기도 했다.

학산 선생이 양정원을 세울 무렵은 매우 혹독한 시기였다. 1938년 3월 조선어 사용금지, 1940년 2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가 실시됐다.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말하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학산 선생은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면서 반드시 우리나라는 독립한다고 말했다.

교사를 배치하는 것도 혹시나 일본의 감시를 감안해 설계했다. 건물 중앙에 원장과 교사가 사용하는 교무실을 배치하고 앞쪽에 출입문을 두었다. 그리고 교무실을 통해 빠져나가 복도를 이용해 양편의 교실로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일제의 갑작스런 사찰이 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또 천정에는 조선어책과 역사책을 보관하는 장소도 만들어두었다.

1941년 당시 14살의 나이로 장흥군 안양면 수문포에서 양정원까지 1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다니며 3년간 공부했던 박영자 할머니는 “가끔 민족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이 찾아올 때면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이 종을 쳤고, 우리는 조선어책을 천정에다 숨긴 채 감쪽같이 일본말을 공부하는 체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게 재미도 있고 무섭기도 하고 …” 

▲ 해방 이전 1944년께 찍은 양정원 학생들의 기념사진
굵은 철사줄에 묶여 학살당해 

교육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학산은 광산개발을 생각했다. 학산은 강진군 칠량면에 고령토 광산을 마련하고 양정원 출신들을 이곳에 일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일제의 징병을 피해보자는 학산의 또다른 생각이 숨어있었다. 당시 일제는 조선청년들을 징병하는 데 혈안이 되었지만 광산개발에 참여하는 경우는 징병을 면제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학산 선생은 독립유격부대 자금지원, 몽양 여운형 선생과 반일지하 조직 운동을 벌였고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몽양과 건국청사에 국사를 논하기도 했지만 1947년 몽양 서거, 1949년 백범 서거 이후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학산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르면 1950년 (음) 6월 8일 새벽에 학산의 시신이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이곳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 12번지에서 처참한 형상으로 발견되었다. 이곳 보성 출신의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보도연맹원에 가입된 20여명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학살당했다.

당시 학살에는 이승만 정권의 이봉하 보성경찰서장이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서장은 일제 강점기시절 1944년 학산이 강진에서 고령토 광산을 운영할 때 강진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학산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학산은 우리 곁을 떠났다. 

*이 기사 중 일부와 사진은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근현대역사문화기행 자료집과 학산 윤윤기(승원)기념사업회 카페(http://cafe.naver.com/haksanysw)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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