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네 잘못을 모르겠니? 현아! 넌 선생님이 나가지도 않았는데 책상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사용했잖아! 그리고 지도하는 선생님에게 고래고래 무례한 행동을 했잖아.”
“수업시간이 아닌데 뭐가 문제예요?”
“너는 왜 그렇게만 생각하니. 선생님은 수업시간만 선생님이니?”
그랬을까.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수업이 끝나자 현이는 자기 책상위에 대자로 드러누워 전화기를 사용한 것이다. 불러서 ‘너는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그럴 수 있니?’라고 지도하려고 했더니, ‘쉬는 시간이다.’ ‘전화기가 아니라 MP3다.’ ‘내 물건이 아니니 돌려 달라.’ ‘물건 주인인 식이마저 다가와 제 물건에 왜 손을 대 ’갈취‘해가냐며 내 손에 있는 전화기를 나꿔채가려고까지 했다.’
상황을 파악하려던 나로선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해를 거듭 할수록 아이들이 무례의 도를 넘어서는 현실이 두렵다. 앞뒤를 살피고 타이르는 교사에게 막무가내로 대드는 것도 그렇고, 자기 물건도 아닌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손댄 아이의 태도도 그렇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생각해보자는 선생님의 요청을 귀찮게 여기는 것도 그렇고, 잘못한 학생은 찾아오지 않고 물건주인이 찾아와 물건만 찾아가려는 태도까지 모두 상식의 도를 넘어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 맥락에서 현이의 생각을 쫓아가면 사태는 지극히 단순해진다. 현이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다. 즉 쉬는 시간에 쉴 권리를 누린 것일 뿐인데 왜 그게 잘못이냐는 것이다. 쉬는 시간에 사용하여 문제될 게 아닌데, 왜 몇 번씩 오라 가라 하면서 물건을 되돌려주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느냐는 것이다.
내 탓이다. 교사가 너무 섬세한 것이 탈인가 싶다. 아이를 지도하는 내내 울그락 붉그락 하는 현이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폭력을 쏟아낼 듯 불안한 표정이다. 아이는 상대방인 나의 의도를 전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나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무례했느냐는 전혀 의식조차도 하지 못한다.
해법을 찾으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과연 아무런 문제도 아닌데 쉬는 시간에 가지고 놀던 전자기기를 압수하였을까?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 실제로는 막무가내로 빼앗아간 것도 아니다. 버릇없는 태도도 중요한 교육이기에 지도를 한 것인데 아이는 진짜 중요한 핵심을 접수하려 하지 않으니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난 슬프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과 세대공감력이 떨어진다. 그들과 차이로 다가오는 현실이 꼭 오색으로 물드는 이 가을의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 같아 슬프기만 하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아이가 제대로 판단력을 갖추고 원만한 상식을 갖추어야 하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낙엽처럼 떨구게 되면 어쩌나 싶어 슬프기만 하다. 이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인가. 정녕, 원인을 찾을 수는 없을까?
요즘 아이들은 교사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 한두 가지 아니다. 그 가운데 생각하기를 귀찮게 여기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다. 더더욱 나와 너, 우리가 구분되는 도덕적 판단력이 엉망이라고 느껴질 때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심정이 된다. 요즘 아이들에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라는 요구는 너무 무리한 것만 같다.
아이들은 갈수록 교사의 역할과 학생의 역할을 나누지 못한 채 자기 식으로 억지를 부릴 때 사회성은 인권의 두려운 장벽이 된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성, 시험 중심의 학교문화와 어른들이 보여주는 자기중심의 사회문화를 바꾸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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