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찾아서(2)
민주주의를 찾아서(2)
  • 이홍길 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9.07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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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억인과의 대화”의 필자들은 대체적으로 중공의 문화대혁명을 긍정하고 있었다.

호킨스 대학교의 정치학교수인 리차드 페퍼는 「오늘날 중국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영양실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새로운 농촌지방의 의료 보건제도는 혁명 후 중국의 정책이 이룩한 인간적 품위의 향상을 대표하는 좋은 예」라거나「개개의 인민공사는 치과의 한방의 양의가 배치되어 있는 병원 내지는 진료소를 갖고 있고 광범의한 의약품이 준비되어 있다.

복부 절개수술 맹장수술 유착수술도 한다.」는 등의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뻬르피뜨는 「중국 인민의 사상교육은 소련과 나치와 수단방법은 비슷하지만 목적은 다르다.

그것은 빈곤과 봉건적 예속과 외국의 지배에서 인민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조운 로빈슨이라는 영국인은 중국은 「실제의 소비자 대중의 필요와 기호를 존중하는 체제를 창조」했고 「중공의 경제정책은 다른 어떤 계획경제의 나라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같으며 중국에는 「실업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갈브레이쓰도 「중국경제는 서양에 있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나라들의 경제체제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실제적이고 다이나믹할 뿐만 아니라 생산품의 질적 측면에서도 감탄할 만큼 성공적이다」고 말하며 상해의 의료 서비스를 찬양하고 있었다.

어떤 다른 필자는 문화혁명은 정치혁명으로 보다 깊은 민주주의, 넓은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집단적 전체적 번영을 촉진하는 것은 바로 대다수의 이익이 된다고 말하여 인민공사적 노력을 긍정하고 있었다.

상해를 살핀 네빌 멕스웰이라는 영국인 교수는 「인구는 많지만 질서적이고 공간미마저 있다. 그것은 활기가 넘치고 정결하며 의지력이 있고 살아있는 도시이다.

옛날 마지못해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커다란 집단이 아니라 무수한 작은 생활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합쳐서 이루어진 거대한 생활사회이다.」라고 지적하여 문화대혁명을 긍정하였다.

동경대의 교수인 기꾸찌는 모택동의 숭배가 광범위한 중국민중의 튼튼한 지지로 유지되고 있어, 중국의 민중은 이 영웅숭배의 틀 안에 끼어들어가 「기꺼이 모택동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려하고 있다」고 말하여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광란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의 사후 문혁은 철저하게 부정되고 문혁가운데 타도된 실권파는 대부분 그 권세를 회복했으며 문혁은 이제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문혁 10년은 국가나 인민에게 대재난이었음이 공인되고 있다.

중국의 영도자들은 다시는 문혁과 같은 재난은 없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인방을 제거한 화국봉 세력이 여전히 문혁의 기치를 내걸려할 때 그들 역시 등소평의 실권파에 의해서 숙청된 것은 4개 현대화가 문혁보다 더 실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산하향(上山下鄕), 지식인의 유배가 없어지고 고시제도가 회복되고 과학연구가 제고되고 공장에서 보너스제도가 부활하여 홍위병이 혁명 나사못에서 해방되어 자기 지력을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조반파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전도를 사회동란의 물결에 던지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일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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