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대항쟁을 회상하자니...
6월 민주대항쟁을 회상하자니...
  • 이강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
  • 승인 2011.06.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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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18일 망월동 5.18묘역(현재 민주열사 묘역)의 기념식에서 5.18민중항쟁동지회 사무처장인 윤강옥 동지는 <민주쟁취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라는 범국민민주연합전선단체의 창립을 발표하였다. 광주.전남은 앞으로 범국민운동으로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한다고 선포하였고, 향후 운동에 대한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관심이 유발되었고, 사찰기관으로부터의 탄압과 간섭이 동시에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윤강옥 동지는 5.18기념 동메달 제작 배포의 건으로 갑자기 수배가 되어 어쩔수 없이 피신의 길로 광주를 떠났다.

광주.전남의 운동은 전문분야에 따라서 일상적 주장은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언제나 투쟁의 저변에는 5.18민중항쟁 정신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정치적 주장이 깔려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청년,학생운동은 물론 여성,노동,농민운동, 정치지향적 재야운동까지 광주.전남의 모든 분야의 지도자와 국민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범국민운동단체>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수사기관에서 의문사하였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수사과정의 고문에 의한 타살임이 밝혀지면서, 1987년 6월 10일 <민주쟁취국민운동 전국본부>가 창립고 서울에서 전국민을 향하여 6월 10일 민주화투쟁 집회를 주도하였고, 전국의 수많은 지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날 선포된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매주말(토,일요일)에는 언제나 범시도민집회를 상시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ㅇ, 평일에는 여러 운동단체들과 종교운동단체들이 솔선수범하여 거리로, 거리로 모여들어 민주쟁취를 주장하였다.

투쟁의 형식과 내용은 언제나 전투경찰에 의하여 집회및 시위 원천봉쇄라는 형식으로 최루탄의 남발이 계속되었다. 광주에서는 금남로1가, 중앙로, YMCA, 원각사, 충장로우체국4거리, 금남로 중앙교회, 중앙로 서현교회, 광주공원, 사직공원, 대인시장, 양동시장, 법원앞, 조선대 앞, 전남대대학병원 등의 지역에서 하루도 쉬지않고 나날이 가두시위가 새벽까지 때로는 아침까지 진행되었다. 물론 최루탄 공격에 대하여 투석, 화염병 등으로 항쟁하였다. 날마다 모든 투쟁의 현장에서는 투쟁 선언문 또는 결의문, 시민 행동수칙 등이 발표되었다.

광주에서는 한마디로 5.18민중항쟁 이래 최대규모에 최다일 연속 투쟁이라는 상황을 겪으면서, 이번에는 결코 도중하차하여서는 안되고 기필코 이겨내서 군부독재를 물리쳐야한다는 공감대가 전체의 시,도민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평일(투쟁이 없는 날)에는 범죄가 발생하여 경찰서가 범죄인으로 차는데, 5.18민중항쟁 때와 똑같이 6월항쟁 기간 동안(1개월)에는 범죄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평소의 범죄인들도 새로운 민주시대를 위하여서는 범죄도 중지한다는 뜻의 상징적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남에서는 나주, 목포, 순천, 여수 등 도시는 물론, 모든 군청의 소재지는 말하것도 없고, 심지어는 진도,완도까지 투쟁의 깃발이 전 시도에 펄럭이고 있었다.
특히 순천에서는 <여순반란사건>이라는 이념투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겪고 난 이후 1987년 6월항쟁이 청년학생은 물론 범시민이 동참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한다. <여순반란사건>이라는 이념의 둑이 무너지고 나니 그 다음날 부터는 언제나 시민들의 투쟁참여가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물로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세력은 <6.29선언>이라는 명목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범국민적 민주화요구의 하나를 수요한다고 발표하여 범국민 참여의 대단위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이투쟁 과정에서 우리는 최루탄에 의한 희생자 연세대학생 이한열 열사를 수일 후에 광주망월묘역으로 모시기 위하여 금남로의 전구간에 100만 가까운 시도민의 애도의 피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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