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일기] 아~ 불쌍한 사람들!
[무산일기] 아~ 불쌍한 사람들!
  • 김영주
  • 승인 2011.05.18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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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극장은 대중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이른바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한다. 그 예술성에 별로 동의하지 못하는 작품이 많은데다가, 대중재미가 없는 작품이 열에 아홉이고 내 재미가 없는 작품도 거의 그러하니, 광주극장에 가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더구나 열에 예닐곱이 우울하고 메스껍고 괴이하며 때론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니 더욱 그렇다. 난 현대 기계문명도 싫거니와 이를 비판하는 현대예술도 싫다.( “예술영화는 왜 재미없을까?”라는 예전 글을 아래쪽에 덧붙인다. )



그래도 어쩌다가 금싸라기 같은 영화를 만나는 기쁨이 있기에, 번번히 실망하면서도 드물게 한 번씩 찾아가게 된다. 탈북 새터민의 서울생활을 그렸다는 [무산일기]가, 외국의 낯선 영화제들에서 9번째 큰 상을 받았단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조감독을 했다는 게 기대되기도 하고, 새터민 삶의 리얼한 모습도 궁금했다. 실망할 셈치고 오랜만에 광주극장엘 갔다. 1년만일까? 그 젊은 극장주인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근데 ‘무산’이 무슨 뜻이지? 빈털터리 無産? 함경북도 茂山이 고향?



주인공의 생김새와 살아가는 모습이 한량없이 답답했고 무참토록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처절한 슬픔’을 넘어서 ‘잔혹한 슬픔’이지만, 거기엔 높은 예술적 감흥이 함께 있다. 그 감흥이 하도 깊어서, 그 잔혹한 슬픔의 자살충동을 견디어내면서 이창동의 작품을 만난다. 그런데 [무산일기]에서는 그 예술적 감흥이 거의 없다. 주인공의 막무가내 순박함이나 한량없이 답답한 처지에 그 어떤 예술적인 냄새를 담아낸다는 게, 오히려 군더더기라거나 괜한 허영으로 여겼을까? 화면에 아무런 꾸밈도 없이, 비리면 비린대로 찌질하면 찌질한 대로 꾸질하면 꾸질한 대로, 쌩날 것을 그냥 그대로 무심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리얼리즘 예술성이라면, 바로 이런 게 진짜가 아닐까? 아무런 예술성이 없는 예술성? 그렇다면 리얼리즘 예술성의 진수를 제대로 만난 건데, 그런데 도무지 아무런 예술적 감흥이 다가오질 않으니 원! 쩝 쩝 쩝 · · · .  -.-;;;



설사 ‘리얼리즘 예술의 진짜 맛’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고 우울함을 안겨주기만 하는 영화이니, 그의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맘도 일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리얼리즘 예술의 진짜 맛’이라며 권유하고픈 맘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도 대중성이 없어서 안타까운데, 이 작품은 더 더욱 대중성이 없다. 아무리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았을지언정 대중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미감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그의 영화인생도 이 영화처럼 한량없이 우울하겠다. 그의 작품세계는 알겠지만, 소금이라도 조금 넣고 고춧가루라도 조금 뿌리길 바란다. 맨 마지막 장면을 느닷없이 뚝 끊어버리며 마무리짓는 건, 無爲를 가장한 人爲처럼 보여서 싫었다. 교활함보다도 더 나쁜 게, 소박함의 가면을 쓴 교활함이다. 삼가고 삼갈 일이다. * 대중재미 : F, * 영화기술 ?, * 삶의 숙성 : 공화파 D+ · 민주파 B0 · 사회파 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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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 · 다문화 가정 · 탈북 새터민들의 삶을 여기저기에서 전해 듣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경험하지 못한 터라 생생하게 알지 못하는데, [방가? 방가!]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생활을 얼마쯤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에선 탈북 새터민들의 생활을 상당히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세상에나 잘난 사람이 있고 못난 사람이 있으며 잘 나가는 사람이 있고 못 나가는 사람이 있다. 나도 내 인생 반쯤을 뒷골목 구석지에서 먼지 펄펄나게 초라하게 살았기 때문에, 삼류인생만도 못한 삶이 당하는 ‘쪽팔린 인생’의 꾸질함을 좀 아는 편이다. 지금은 배에 기름이 차올라 꾸질꾸질한 ‘그 때 그 시절의 기억’이 많이 흐릿해지면서, 중산층의 비열한 위선에 점점 젖어들어 가고 있다. 때론 상류층의 명품을 향한 갈증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다가 [무산일기]같은 영화를 만나면, 한 편으론 그 때 그 시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지금의 내 삶을 반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 때 그 시절의 설움이 오버랩되어 우울해져서 회피하고 싶기도 하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불쌍한 사람들.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그려내는 사회파 소설이다. 그는 "법률 · 관습 · 풍속 때문에 사회적 처벌이 생겨나고, 이 처벌로 문명의 한복판에 인간들이 지옥을 만들어서, 神이 만들어야 할 숙명을 인간이 만들어낸 운명으로 헝클어뜨리고 있다."며,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악을 ‘장발쨩 이야기’로 고발하였다. 아무리 인생살이가 苦海라지만, 장발쨩이나 [무산일기]의 주인공처럼 멸시와 오욕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한량없이 우울하다. 그 불쌍한 사람들의 처절한 슬픔이, 어찌 장발쨩에게만 그러하겠나? 우리 인류의 기나긴 발자취에 무수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과연 神이 있기나 하는 걸까? 아~ 불쌍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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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영화는 재미없다.  왜?    080103
 
            
 
"예술영화는 재미없다." 그렇다. 일반관객의 눈으로 보면, 재미만 없는 게 아니라 주제가 무겁고 우울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게다가 삐딱하고 엽기적이거나 어지럽고 이상야릇한 영화가 많고 심지어는 정신병적인 기괴함이 지나쳐서 메스꺼움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건 일반사람들이 '20세기 이후의 서양의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에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의 현대사상이란 니체에서 푸코에 이르는 사람들이고, 현대예술은 피카소에서 백남준 그리고 박찬욱감독이나 김기덕감독에 이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두루뭉술하게 아울러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 자세하게 이야기하려면 10권의 책이 필요하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몇 줄의 글로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내 나름으로 공부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에는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1. 서양사상과 종교는 ‘대립적 이분법’을 뿌리로 하고 있다. 가장 큰 줄기는 ‘낮과 밤 · 인간과 자연 · 남자와 여자 · 일과 놀이 · 이성과 감성 · 필연과 우연’에 대한 이분법이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서양의 주류사상은 그 이분법에 극렬한 선과 악을 설정하여 ‘낮 · 인간 · 남자 · 일 · 이성 · 필연’ 등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밤 · 자연 · 여자 · 놀이 · 감성 · 우연’ 등을 지나치게 악마로 몰아치며 '마녀사냥'하였다.( 서양 주류의 지나치게 극렬한 선과 악에는 헤브라이즘의 예수교까지 덧붙여져서 일반사람들의 극렬한 자기집착의 생활윤리를 만들어내어, 사상을 넘어서서 일반사람들의 생활문화에까지 깊이 적셔들게 된다.) 20세기에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은 이에 극렬하게 반항하며 그 거꾸로 찬양하고 미화하고 몰아치고 비난한다.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은 2000여년동안 주류사상의 부당한 폭압과 마녀사상에 저항한다는 정당성을 갖고 있음에 반하여, 그 동안 주류사상이 자기집착으로 부당하게 폭압에 터전이었던 '대립적 이분법'과 동일한 사색틀을 그대로 똑 같이 닮아있다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동양사상이 서양사상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그 대안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동양사상의 주류에도 서양사상의 주류가 범한 문제점이 있다. 그 정도가 좀 덜 할 따름이다. 게다가 동양사상의 뿌리에도 문제점이 있다. 서양사상의 뿌리에 박힌 문제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지만. )

2. 서양의 주류사상은 아직도 철옹성처럼 굳건하다.(20세기 후반에 많이 흔들리고는 있지만) 그래서 주류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악마의 창녀'라거나 '지적 사기'라며, 그 사상적 정신병적인 삐딱함과 엽기성에 따른 잡스런 어지러움 · 돌발적 상상력 · 퇴폐적 문란함과 음울한 자살충동을 맹공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주류사상이 국가와 종교에 의한 교육과 윤리를 등에 업고 벌이는 행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에 못지않게 그리 떳떳하지 못한 사회구조적 억압과 제도적 폭행을 일삼고 있는지라, 그들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어서, 그 맹공에 근본적인 구멍이 뚫려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은 국가와 종교를 비롯한 기존의 기득권 세력의 횡포와 억압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지나치게 정신병적인 삐딱함과 엽기성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을 너무 지나치게 뛰어넘어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일반사람과의 단절을 연결짓는 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은 보이질 않고, 자기들의 이런 잘못을 마치 천재이란 듯이 뻐기면서 일반사람들을 멸시하는 듯한 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스컴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이들을 하도 '천재'라며 추켜올리니까, 일반사람들은 한편으로 주눅들고 한편으로 쪽팔리면서, 이들을 손가락질하며 비난하자니 '무식한 놈이나 천재를 몰라보는 놈 또는 열등감의 삐딱함'으로 몰릴까봐서 이들의 잘못을 내놓고 비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반사람은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을 만나면 매갑시 주눅들고 신경질이 나지만, 억지로 아는 척 위선적인 몸짓을 하거나 슬슬 피하며 아예 그 부근에 얼쩡거리지 않는 쪽으로 피해 버린다. 마침내 이 '못된 천재'들은 외롭게 추위에 떨면서 시대가 알아주지 않는 '천재의 고독'이라는 어두운 그늘에서 개폼잡다가 사라지면 그대로 끝장나는 것이고, 우연히 살아나면 '비릿한 지적 허영'에 놀아나는 '가짜 노블레스들의 노리개'로 팔리게 된다. 자기들 편이 되어주어야 할 서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원한을 품었던 기득권 세력에게 ‘위선적 노리개’로 이용당하고 말게 되는 모순된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의 비극은 그들이 기존 주류사상에게서 소외당하고 저항하면서 상처받는 것 그리고 어두운 구석에서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또는 퇴폐적인 문란에 빠져드는 '외로운 천재의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충동에 빠져드는 것에 있기도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모욕적인 비극은 진짜로 사랑받아야 할 서민에게 오히려 외면당하고 마침내는 그들이 저항하며 저주하였던 기득권 세력에게 이용당하고 마는 '적과의 동침'에 있다.
 
우리가 현대예술을 제대로 감상하고 그 잘못된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드높은 세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하나,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구조적 속성을 잘 파악해야 한다.( 내 자랑 같아서 쑥스럽지만, 내가 쓴 [시장주의, 그 신화와 환상, 인물과 사상사, 1999]라는 책이 일반사람이 그나마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다른 책들은 너무 어렵거나 번잡하며 핵심포인트를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 둘, 서양의 근대사상과 현대사상이 갈등하는 포인트를 잘 알아야 한다.( 근대의 전후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양사회사와 서양철학사를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쉽고 알차게 잘 정리하고 있는 책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내가 일반사람들에게 권한다면, 중국CCTV의 다큐 [대국굴기]12편을 잘 소화한 다음에,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13권을 서너 번 보고, 또 그의 만화 [현대문명진단]3권을 두어 번 본 다음에, 현대사상 개론서 쉬운 걸 찾아서 읽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책에선 남경태의 [현대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나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이 그나마 쉽게 써진 책이다. 일본책을 읽을 수 있다면, 小阪修平의 책이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 셋, 서양예술사과 현대예술의 큰 줄기를 잘 잡고 있어야 한다.( 아직 마땅한 책을 만나지 못했지만,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책이 그나마 가장 좋은 책으로 보인다. 일목요연한 정리가 되지 않고, 번역이 좋질 못해 초보자들에게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케네스의 [문명과 예술]도 괜찮지만, 현대예술에 관한 소개가 약하다. 우리나라 책으로는 이주헌의 미술에 관한 책이 그나마 좋아 보인다. )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책을 본 게 아니니까, 어딘가에 더 좋은 책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이렇다. 이것마저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우면, 내 책 [시장주의, 그 신화와 환상]이라는 책의 맨 처음 1장과 맨 끝의 5장만 두어 번쯤 읽어보고, 이주헌의 미술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어보는 정도로 그나마 답답한 갈증은 조금 풀 수 있을 것이다. 이 답답함 때문에, 감히 내가 내 나름의 [예술론]을 써 볼까하는 맘을 갖고 있다.

 

현대사상과 현대예술이 이러한 서양문화의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는 말과 글들은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은 채 그걸 무지 어지럽고 어렵게 말하면서, ‘학문과 예술 그리고 천재’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주눅주고 똥폼 잡는 잘못된 ‘지적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술영화’는 거의 대부분 우울하고 어지럽고 이상하고 쪽팔리고 재미없다. 더구나 영화기술이나 삶의 깊이가 그리 깊지도 않으면서, 괜히 예술영화인 척 진지하게 똥폼 잡는 경우도 많다.( 영화평론가들도 이들의 똥폼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해 보인다. 지적 허영이나 위선에 빠진 평론가가 대체로 그렇다. 상당히 많은 평론가가 이런 수렁에 빠져 있어 보인다. ) 그러나 그 우울하고 시니컬함에 진지한 삶의 어두운 리얼러티를 잘 그려내는 영화도 제법 있다. [박하사탕] [와이키키 부라더스] [지구를 지켜라] [밀양]같은 우리나라 영화나,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돌이킬 수 없는] 같은 외국영화는 참 대단한 영화이다. 내가 [슛뎀 업]으로 소개한 Kitsch영화도 이런 예술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일반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싸구려 삼류영화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난 우리 영화 [달콤 쌀벌한 연인]을 최고의 키치영화로 꼽는다.

그래서 흔히 평론가들이 예술영화라고 말해도, 그걸 ‘참다운 예술영화’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대단한 예술영화를 만나면, 그 감동은 [쥬라기공원1] [터미네이터2] [스파이더맨2] [킹콩]에서 받은 감동과는 전혀 다른 감동의 깊이에 빠져든다. 광주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가 예술영화라지만, 모두 고만고만하게 괜한 똥폼만 잡고 말 수도 있고, 1년에 한 두 편 있을까 말까 3년이나 5년에 한 번 아니 10년에 한 번 다가올지도 모를 감동이 있을 수도 있다. 예술영화라고 해서, 주눅들 필요도 없고 억지로 감동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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