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의 역사적 회고, 돌아본다.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회고, 돌아본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11.04.0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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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비극의 전말
애통 ․ 절통도 미진한 회고
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1. 머리말

인간사회에 있어서 현실을 인식하고 집행하는데 있어서 좌와 우의 태도가 당연히 있겠지만, 그것들이 공동체를 상해하고 구성원들의 삶을 파멸시키고 왜곡시킴이 한반도에서 보다 더 우심한 지역이 있었을까를 자문해 본다. 중국과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 있어서도 좌우투쟁이 심하지 않았는가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이미 통일국가이거나 준 통일 상태에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고 좌우투쟁의 상흔이 늦봄의 잔설처럼 여전해서 그 명명백백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 오늘이다. 더욱이

가관인 것은 좌우의 투쟁을 진창 밭으로 만들고 분단의 선봉장이었던 데다 민주국가의 여명을 독재로 물들이고 친일세력들의 잔명을 조장해 민족정기를 기본적으로 훼손시킨 이승만의 동상을 다시 광화문에다 세우겠다는 망동이 꿈틀된다니 이 아니 개탄스러운가?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서 밝히고 선언하다시피 4․19정신을 이어받은 민주공화국인데, 이승만은 4월 혁명으로 축출되고 그의 생전에 외람되게 건립되었던 동상들도 철거되었는데, 다시 동상을 세우겠다고 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릴 일이다.

제주 4‧3사건은 크게 보면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그 연원이 있는데, 단독정부를 주장하여 건립한 사람이 이승만인 것을 생각하면 4‧3사건 학살 책임을 의당 져야 할 사람의 동상까지 세우겠다니 설립 음모자들의 심산이 민주 대한민국호의 역주행에 있음을 쉽게 알겠다. 백번 양보해서 나라의 시작을 화려하게 도색하여 조상숭배의 미덕을 들어내고자 한 것이 지나쳤다고 자복하고, 민주공화국의 시작은 우여곡절이 많아 착종했으나 그 결과는 창성했다고 민주시민들의 용맹정진을 격려함이 어떨까? 이미 보내버린 시간인데, 시작이 좋아야 결과도 좋다고 억지춘향으로 소급하여 미화하는 추태를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시작은 미미하나 결과는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곱씹을 일이다.

2. 제주 4‧3비극의 전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그 “진상조사보고 결론”에서 “제주 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 사건”이라 지적하면서 사건 발생이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진상보고는 사건의 배경이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고 미국의 한국사학자 부루스 커밍스도 1950년 이전에 제주도만큼 해방이후 한국의 정치적 갈등을 겪은 곳은 없다고 지적한다.

진상보고는 해방이후 종전 직후 일본군 철수와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인한 인구변동과 광복에 대한 초기 기대와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극심한 흉년에다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사회문제로 양성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커밍스에 의하면 1948년 초까지 제주도의 실제적인 정치 지도력은 인민위원회가 갖고 있었다. 하지장군이 말한 대로 “소련(코민테른)의 별다른 영향 없이 인민위원회에 의해 평화롭게 통제된... 진정한 자치공동체 지역”이었다. 군정판사 양원일이 1948년 6월에 실시한 공식조사에 따르면 “해방이후 수립된 제주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로서 권력을 행사해왔고... 경찰은 주민을 잔인하게 다룸으로써 민심을 얻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미군정의 또 다른 조사평가에 의하면, “주민 가운데 대략 3분의 2가 온건 좌익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 좌익조직의 의장인 박씨 성의 전임 제주도 지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매우 친미적”이었다. 제주도민들은 분리주의자들로 본토인들을 싫어해 그들의 자치 자결을 소망하였다.

섬사람들 5~6명 중 한명이 죽었고 절반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다.<사진제공: 제주4.3평화재단_ 고범석 연구원>

4‧3사건을 촉발한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사망 6명 중상 8명을 초래한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일반인이었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그들의 정치적 출로를 위하여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이상이 참여한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시한 미군정은 조사단을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으면서도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어 강경정책을 펼쳤다. 도지사 및 군정수뇌들이 외지인으로 교체 되었고 서청단원과 의용경찰이 대거 제주에 투입돼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활동을 펼쳤다. 4‧3폭동 발발 전까지 2,500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은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정당국에 등을 돌린 민심을 포착해 조직의 수호와 방어를 이루고 당면의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이들의 무장투쟁은 1948년 새벽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단선 단정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미군정은 초동진압에 실패하자 군정당국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명령을 내렸다. 진압작전 동안 9연대장 김익열과 무장대 김달삼과의 사이에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해결이 모색되기도 하였으나 경찰과 우익청년단체가 조작한「오라리」방화사건으로 그 단초도 시작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1948년 5월 6일 4‧3항쟁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한미군정 고위간부들의 회의가 열렸는데 국방 경비대 측은 경찰의 강경탄압에 그 이유를 두고 경찰은 공산주의자들 선동으로 지목한 끝에 김익렬과 조병옥 사이에 육탄전까지 벌어졌으나 결국 김익렬은 해임되고 이후 잔인한 토벌을 자행한 박진경이 그 뒤를 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야만적 진압작전이 전개 되었다. <사진제공: 제주4.3평화재단_ 고범석 연구원>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는데 그 과정에 제주에 파견예정인 14연대가 반기를 들어 세칭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앞서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조사대상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이는 대살을 자행하였다.

1949년 6월 무장대 총책 이덕우의 사살로 무장대는 궤멸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시작된 제주 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 된 희생자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10,955명), 무장대 12.6%(1,764명), 공란9%(1,266명)로 나타나는데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 5.4%(814명)와 61세 이상 노인 6.1%(860명)로 전체 희생자의 11.9%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 희생이 21.3%(2,985명)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야만적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루스 커밍스가 전하는 대한민국 당국의 기록에 의하면 1948년 말까지 102건의 전투에 양측에서 5,000명 이상의 전투원이 참가, 422명의 반란자들이 사망했고, 일부 미국 소식통들은 이 투쟁에서 15,000~20,000명의 섬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대한민국 통신사는 27,719명이라는 공식적인 숫자를 인용했고 북한 측의 숫자는 3만 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 지사는 비공식적으로 미 정보기관에 6만 명이 사망하고 4만 명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말하였다. 섬사람들 5~6명중 한명이 죽었고 절반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62주년 위령제 모습 <사진제공: 제주4.3평화재단_ 고범석 연구원>



3. 애통 ․ 절통도 미진한 회고.

4‧3사건 이후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사건 때 군경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하여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아, 제주도민들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리고 4‧3상흔들을 대물림 받았다.

4‧3사건은 냉전과 분단의 부산물이었다. 냉전의 한 당사국인 미국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분단의 기수이자 중군장인 이승만의 책임 역시 면할 수 없다. 더욱이 이승만은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 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고 있음을 보면 미국의 원조 획득을 위해서는 가혹한 방법의 탄압이 법의 존엄을 세우는 것이었으니, 광화문에 동상을 세워 길이 우러러야 하는 소위 국부 이승만의 실체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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