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이 내 안으로’
‘더 깊이 내 안으로’
  • 범현이
  • 승인 2010.03.12 18: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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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고 시침하며 소통하는 작가 ‘나예심(47)’

▲ 나예심 작가.
프롤로그

때 아닌 대설주의보이다. 화단에 막 목을 내민 수선화의 꽃송이들이 못내 안타까워 어제 밤 비닐봉지 하나씩을 모자로 씌워주었다. 비닐봉지 모자를 쓴 수선화 한 송이가 뭐가 그리 급했는지 노란 꽃을 간 밤 그 추위 속에서 피웠다.

하루하루 미루는 일이 없는 자연 속 식물들. 찬찬히 물방울 맺혀있는 수선화를 들여다본다. 비닐 모자 위 눈을 털어주고 다시 한 번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비닐 모자를 묶어 준다. 하나, 둘, 셋, 모두 열 개의 비닐모자가 하얀 눈 속에 초가집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걸어 작가를 만나러 간다. 천천히 걷는다. 한 겨울보다 더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손이 시리도록 눈발은 쏟아진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인다. 돌 담 사이로 이미 꽃을 피우기 시작한 야생화들. 이미 핀 하얗고 여린 꽃잎 위로도 눈이 소복하다.

밖으로 잠긴 문을 열고, 오늘 한 번도 디딘 흔적이 없는 눈 쌓인 계단을 올라 작가가 있는 곳에 들어선다. 향냄새 자욱하고 마루에는 긴 좌탁이 놓여있다. 앉자마자 묻는다. 바느질, 왜 하세요? 눈길은 이미 벽에 걸려있는 긴 다포를 보고 있다.

바늘. 조각난 시간과 삶의 흔적을 기워

바늘을 만난 건 5년 전이다. “바느질을 싫어했었다. 하지만 바늘은 우연히 아니라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는 것을 느낀다. 바늘이 없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할 수 없다.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 준비되어 있었던 운명이 나를 떠밀었고, 나 역시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 다가섰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작가는 말한다.


방 안 가득 종이를 말아 놓은 것처럼 광목과 무명이 바구니에, 혹은 책장에 책처럼 꽂혀 있다. 색실이 둥둥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떠다니고 조각조각의 헝겊들이 제색으로, 염색된 천으로 즐비하다.

감물 염색을 한 천을 돌돌 말아놓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향기가 느껴진다. “용도에 따라 광목이나 무명을 감물로 염색을 한다. 몇 날 며칠을 두고 자연채광 그대로 햇빛에 널어 말리니 다른 곳에서 하는 염색과는 다른 깊은 맛과 색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바늘이 손을 전혀 안댄 천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해질녘 어스름한 석양빛. 그믐달 짙은 밤하늘 빛. 살아가는 것이 너무 막막해 올려다 본 표현할 수 없는 절망적인 나만 느낄 수 있는 하늘 빛. 작가는 그 천위에 한 땀 한 땀 바늘을 움직여가며 그림을 그린다. 자기만의 천, 자기만의 하늘, 자기만의 세상을 바늘로 색실을 움직여가며 그림을 그린다.

“시간이 금방 간다. 내가 바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바늘이 나를 자궁 안으로 들여 낳아가며 내가 바늘인 지, 바늘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날을 새는 일이 허다하다”고 고백한다.

가녀린 나무들, 그리고 그믐달

가녀리게 개켜져 있는 작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조이다. 작은 들풀과 작은 나뭇가지들, 그믐달과 북두칠성. 그리고 한 겨울 눈을 한 땀 한 땀 실로 표현해 놓은 눈 쌓인 나무와 언덕. 자귀나무 꽃. 산수국. 엉겅퀴.

텅 비어 있는 듯 하지만 자연의 부산스러운 이야기들로 꽉 차있다. 비어있어서 더 차 있는 팽팽한 느낌이다. 작가를 닮았다. 강한 눈빛, 깊은 미소가 그렇다. 뭉툭한 손마디는 바느질에 사용하는 골무를 연상 시킨다. 주변이 운무처럼 소요하다.

강한 생명력을 작품 안에서 읽는다. 눈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은 채 온통 눈을 안고 있는 나무와, 가느다란 가지만을 가지고도 한 송이 꽃을 피워내고 있는 들꽃들. 질경이의 억센 생명력과는 또 다른 선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리지만 끊임없이 새로 피어나는 생명력을 본다. 밟혀도 살아나는 질경이가 아닌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곳에 자리한 채, 누가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아도 홀로 자라고, 성장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다음 해에 다시 피어나는 들풀과 같은 생명력이다.

그 어디에도 초록 짙은 이파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외로운 시간이었다. 기억 속의 흔적을 따라 색실에 바늘을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지금껏 살아 온 생애는 거기까지였다. 어쩌면 털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줄기만을 그리며 작가는 작품 안에서 말한다. 줄기에 꽃을 피우기 위해 이파리에 필요한 모든 영양을 줘버려야 해. 난 영양을 공급해주는 이파리의 광합성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어. 건조한 막대 같은 흔적을 붙잡고도 얼마든지 내 마음의 꽃을 피워낼 수 있어.

다시 한 발 내딛는 세상. 손을 내밀어

다포로 제작된 작품들은 차를 마시면서 가질 수 있는 편안한 마음들이 그대로 표현된다. “한때는 전통찻집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지역 안에서의 일은 아니었지만 차를 가까이하면서 다구에 필요한 차 도구를 직접 만들고 싶어졌고, 그것이 바늘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 지금의 다포와 가리개, 차탁 등으로 만들어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바느질 기법 또한 자유스럽다. 무명과 광목이 염색되면 바로 천은 작가의 마음이 된다.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말하고 싶은 세상의 형용사들, 바라보고 가까이 두고 싶은 자연들이 화폭 안에 다소곳하고 여리게 담아진다.

북두칠성 하나 국자모양으로 마음 안에 들어선다. 서로 모여 형상을 만들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빛으로 밖에 만날 수 없는 별들이다. 아니, 자신들은 빛을 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비로소 일곱 개의 별이 서로 한 몸으로 묶어져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작가의 마음에도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다시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딛는 것이 보인다. 여린 초록 잎을 가녀리게 달고 있는 버드나무 한그루. 나무의 몸통은 없지만 안개처럼 작은 초록의 촉수를 화폭 안에 내민다. 세상을 향해 화해의 손을 내민다.

들풀 하나하나가 부처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이 보인다. 느껴진다.

일시 : 3월20일(토)까지
장소 : 평촌갤러리
문의 : 016-9209-2037

에필로그

두 손이 비틀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순 없잖아요. 누치로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 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 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이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잇겠지요. 올 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쫒아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 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이지 누가 알겠어요?  // 따박따박 날개 짓 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 作 조원. 詩 담쟁이넝쿨

말을 하고 싶어지거나 글을 쓰고 싶을 때, 말하지 않고 글을 쓰지 않은 적이 있었다. 형용사들이 항상 뛰어 다녔다. 형용사들과의 수많은 꿈.

날은 어두워지고 유년의 기억 속. 대문을 거는 소리. 나는 나를 재운다. 거리에 서성거리며 그들의 꿈이 커가는 무늬와 합류한다. 이제까지 나는 세상에 대해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 자신에게 화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코 포기할 수도 없는, 놔주지도 않는 내 꿈. 나는 나를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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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2010-03-13 09:31:45
기자님~
나예심님 만나러,서울서 기차타고 내려갑니다~
가는 길에 이런 좋은 글을 만나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가녀린 듯,,,맑고 고요한 나예심님 작품 참 좋아합니다,
좋은 글,,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