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번만큼은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가보자하는 생각이었다. 이미 익숙해 지도처럼 선연한 찾아갈 곳을 내비를 켜고 따라 나섰다. 가는 도중 때때로 웃음이 나왔다. 그냥 평소의 길로 가도 될 것을, 사실은 그 길이 더 지름길 같은데 지시하는 대로 가는 길은 생소하고 돌아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볼일도 없는 공항을 들려 우회전, 좌회전, 직진을 하자 거기 발아래 넓은 바다가 제 몸을 흔들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내비를 무시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내비야 고맙다. 처음 와보는 이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 네가 나를 이리로 이끌었구나. 차에서 내려 한참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차고 서늘한 바람이 소금기를 머금고 머리를 흩뜨렸다.
떠나있지만 머무르고 있는 듯, 머물러도 떠나있는 듯한 각성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마다 퍼져간다. 그리고 길게 누운 국도 1호선의 척추를 따라 모든 길들이 찰나에, 한꺼번에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구로나루. 바다가 멀리 끝까지 보이는 그곳에 작가가 있었다. 곧 바다를 향해 닻을 들어 올릴 기세로 거기 작가의 작업실이 있었다.
바다와 작업실, 대장간과 목재의 아름다운 동거
작업실 밖은 바다, 안은 목재와 철공소. 여닫는 문하나 사이로 두 세상이 공존한다. 넓은 바다는 하염없이 소금기를 밀어다 주고 천장 높은 작업실 안에서는 재료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젓갈공장이었던 이곳을 작업실로 사용하며 작가는 바다의 푸른 물에 저절로 염색되어가고 있다. 10여 년이 넘도록 작업해 온 스텐리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과 바람과 태양, 소금기가 섞여 적당이 버무려진 재료에 작가는 자신만의 감성을 다시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다루기 어렵다는 스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가장 비싼 재료인데도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집중을 하면 할수록 작품 역시 내가 원하는 의도대로 구부려지고 꽃으로 피어져 오히려 재료선택이 더 탁월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용접하는 재미도 남다르다고 설명한다. 면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자르고 오려내 용접을 하면 그라인더로 광을 내야하는 번거로운 작업임에도 오히려 즐기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너무나 견고한 재료의 특징이 일반인들의 근접을 막아내는데 작가는 스텐으로 꽃을 만들고 대나무를 조형하며 스스로를 즐긴다.
늘 살아온 생활의 과정, 불합리한 것 보다는 지나간 삶의 향수가 어린 흔적들을 작품 안에 담아내려 노력한다. 에스키스를 하고 사진을 찍어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의 방향성이 정해지면 두드리고 잘라가며 용접하는 과정 중에 다시 스텐의 재질과 망설임 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며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거친다.
피어나는 꽃, 자라나는 대나무
스텐이라는 재료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매끄럽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구부려 환히 피어나는 꽃을 만들고, 두드려 대나무의 작은 마디를 만들어내고 어린 시절의 향수까지 한 줌 넣어 풍선을 매달고 달리는 자전거를 완성하기도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담겨있다. 시대가 달라져서 유년의 놀이기구들이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받는 것은 자전거이다. 네발 달린 자전거. 보조바퀴를 떼기 전까지는 어른들의 힘을 빌려 사랑을 흡수하고 자신의 두 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부터 점점 스스로의 바람개비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는 자전거이다.
바람개비 역시 꿈의 바람개비이다. 무겁고 육중한 둔탁한 스텐을 광을 내고 또 내어 빛나는 꿈들이 바람개비로 살아난다. 윙윙, 소리를 내며 그 꿈들은 미래를 향해 바람으로 돌아간다.
얼마나 많은 바람개비들이 더 이상은 꿀 수 없는 꿈들을 알아갈 때까지 무수히 돌아가는 지. 작가는 이런 작고 소중한 우리의 유년을 작품 안에 담아낸다.
작가의 작업들은 대부분이 스케일이 크다. “스텐의 특징인 원상태로 되돌아가려하는 탄성으로 인해 힘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나는 늘 재료와 타협을 한다. 고집을 피우다간 완성을 할 수도 없고 설사 내 고집대로 물리적으로 완성을 했다 해도 들여다 볼 때마다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바람개비를 돌리며 자전거를 타고 떠나다
10년 넘은 스텐 작업을 하다 보니 하고 싶은 작업도 많다. 대나무와 꽃을 만들더니, 지금의 작업대 위에는 난 꽃이 한 송이 한 송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직은 용접을 다하지도 않았고, 광을 내지도 않았다. 꽃 잎 상태의 난 꽃이 생명으로 피어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나무를 만들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을 완성해보자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대나무의 반응도 좋았다. 지금은 난 꽃의 꽃잎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고 고백한다.
가장 단순화 된 선을 사용한다. 단순한 선 안에서 단지 조형으로만 돋보이는 작품이 아닌 견고한 스텐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부드러움, 차가움 보다는 정겨움, 연약함 등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재료가 강성이지만 강함 속에는 늘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작품 안에 담아내려 한다.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화 된 선이지만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선은 최대한 단순화 되어 있지만 작품이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보면 볼수록 어린 날의 향수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 아니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업 작가로 남고 싶다.”
작가는 현재 목포 지부장으로 민미협을 이끌고 있으며 평촌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다.
일시 : 3월20일(토)까지
장소 : 평촌갤러리
문의 : 010-7113-0515
에필로그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겠다고 쓴 네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웠다. 편지를 읽기 전까지 나도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편지를 찢으며 봉분을 다졌다. 나를 지켜보고 선 살구나무가 풋살구를 톡톡 떨구었다. 풋살구를 한 입 깨물었다. 한때 너는 나의 나무에 열려있던 붉은 살구였다. 지금은 서로 장례식을 치르지만 먼 하늘가에서 몰려 온 먹구름이 제 몸을 잘게 찢었다. 우우우- 미친 늑대처럼 빗줄기가 울부짖었다. 내 몸은 빗줄기에 후줄근히 젖어들었다. 내 속의 무덤은 빗줄기에 젖었다. 한 순간 내 속이 자궁으로 변했다. 망할 것. 나는 너를 낳고 싶었다. - 詩김충규. 이별후의 장례식.
일주일이 넘도록 단 줄도 쓰지를 못한다. 정신없이 달리다 어느 순간 문득 뛰기를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출발선도 도달해야 할 지점도 보이지 않았을 때의 막막함.
기적소리는 오랫동안 내 꿈의 바탕이었다. 구름이 나지막이 내려앉아 있거나 안개가 지척을 구분할 수 없도록 혼곤히 잠이 든 꿈속으로 스며들어와 깨어있을 것을 주문하곤 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끝내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창문을 열면 온통 안개뿐인데, 안개의 풀어진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면서 작은 방안에 가득 찰뿐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