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sire became gods’
‘The desire became gods’
  • 범현이
  • 승인 2010.02.26 15:2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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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그린 작가 신창운(42)

에필로그

많이 기다렸다. 작가가 인도로 떠나기 한 달 전의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문화인류학 논문집도 꼼꼼히 읽었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가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로 인식되고, 작업 안에서 어떤 프로세스(process)를 거쳐 완벽하게 녹아들어 가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 신창운 작가.

돌아와 전시를 연다는 메일을 받고 인도에서의 2년이 무엇보다도 궁금해졌다. 작업의 방향이 어떻게 찾아지고 어떤 결실을 얻어와 무엇을 보여 줄까 부터 얼마나 부단한 시간 동안 자신을 인내했을까하는 생각까지 온통 궁금투성이었다.

일요일 아침. 작가를 만나러 전시장으로 향한다. 인도에서 돌아온 지 이제 일주일.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동안의 인내와 행복을 보여주는 일이다.
 
아무도 없는 갤러리로 들어서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제는 많이 편안해졌구나. 그림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읽어가게 만들더니 이제는 녹아들었구나. 이제는 서성이지 않고 길을 걸어갈 수 있겠구나. 제 길을, 제 하늘과 땅을 찾았구나.
 
그가 붉은 문을 뒤로 하고 갤러리 안으로 멀리서 걸어들어 온다. 여전히 해맑은 얼굴, 눈빛. 달라진 것은 묶었던 긴 머리를 자른 것뿐이다.  

동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예술가의 책임감 

넓은 전시장은 세 분류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내용의 그림들이 걸려있다. 읽어가는 동안 그가 인식하고 있는 휴머니즘이 점점 궁금해진다. 이전의 작가가 보여준 작업의 이미지는 시대정신이었다. 

인도로 가기 전, 보여준 것은 지본주의의 퇴폐와 물질만능주의, 그것의 폐해로 몰락해가는 휴머니즘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에 대한 물음표가 주조였다. 나누었던 대화와 질문을 정확히 기억한다. 맞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작업 안에 그 시대상을 담는 일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예술은 단지 부르주아의 향락으로 전락할 뿐이다. 

“예술가는 시대를 말해야 한다. 자신이 살아 숨 쉬던 시간, 자신이 기록을 해야 할 공간을 떠나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으며 시대를 말하지 않는 작업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안 된다. 소설가는 소설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미술가는 그림으로 혹은 자신만의 표현기법으로 직설이 아니면 우회적으로라도 시대를 담아야한다.” 

그의 작업에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림이 아니라 조각조각 분류를 하며 표현되어 있는 의미를 생각하고 곱씹게 하는 한 편의 서사시였다. 한정된 캔버스 안에 구름의 집을 지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빽빽하게 담곤 했다. 읽고 나면 한숨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전시 역시 인도의 신을 기본으로 사회의 부조리와 그 부조리의 바닥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를 면밀히 관찰하고 섬세하게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더구나 완벽하게 녹아들어 사고는 더 자유스러워졌다. 편안하게 읽혀졌다.
 

▲ 작품명 <욕망 여신 드루가>
<신이 된 욕망>을 표현한 영혼, 영혼의 자유로움 

작업의 모든 주제는 <욕망>이다. 신과 동등해지려고 하늘 높이만큼 쌓아올린 바벨탑과 같은 동음이다. 작거나 크거나 욕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지기 마련이다. 물질만능인 현대사회에서의 욕망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더구나 카스트라는 신분제도가 전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인도에서의 욕망은, 신과 함께이면서도 멈출 수 없는 욕망의 근원이 무엇인지 작가는 그림 안에 담아내고자 했다. 

작가의 작업은 인도에 첫 발을 들었던 시점과, 인도에서 살며 바라보게 된 종교,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인도의 신인 락슈미, 가네샤, 사라스와띠, 크리슈나 등 인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성역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작업이 이번 전시의 주제였다. 

첫발을 디뎠던 인도에서의 작가는 이방인이었다. “모든 생활에 녹아들어 있는 인도의 신들이 생경했다. 길을 가다가도 그들은 기도하며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늘 신과 함께였다. 그들만의 신들이 존재하는 나라. 신과 같이 살아가는 나라. 신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에도 있고, 공원에도 있으며 물 위, 침대 위에도 그들의 신은 자리했다. 개인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신들을 불러 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두 번째는 그가 인도를 가기 전부터 고민해 오던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 부조리를 은유적인 자신만의 방법으로 집요하게 풀어낸 작업이다. 끊임없는 계단을 오르지만 그 계단은 동전으로 이루어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욕망의 계단이다. 동전을 딛고 오르지만 결국은 더 이상은 오를 수 없는 공허만이 남는다. 아니면 추락할 수밖에 없다. 황금이 좋아 신이 되기를 욕망하지만 남는 것은 박제 되거나 몸통의 한 부분이 잘려나가고 파묻힌 인간의 형상의 없는 인간일 뿐이다. 


마지막으로는 추상적인 형태의 작품들로 전통적인 욕망과 권력에 비추어진 현대의 욕망을 인도의 문화에 한국적인 문화까지 복합적으로 덧입혀 표현한 작업들이다. 


신이 된 욕망 - 인도문화와 한국문화의 재결합
 

불화인 듯, 탱화인 듯 하면서도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작업이다. 부처가 그려진 것 같지만 사실은 부처가 아니다. 작가는 “인도에서의 부처는 여러 신들 중의 하나이다. 불교가 이곳에서 파생되어 왔지만 인도의 신들은 정말 많다. 많지만 각각의 의미와 다른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면면히 수 천 년을 이어져 왔다. 나의 작업은 거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인의 믿는 행위조차도 욕망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인가..하는 물음이 시작되고 사회적인 물음 보다는 개인적인 기복을 비는 믿음이 더 많은 것을 보고, 내세를 위해 현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욕망의 실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 작품명 <욕망 여신 사라스와띠>

작가의 욕망에 대한 생각은 작업 안에서 선연하게 잘 드러난다. 언뜻 보면 엉켜진 실타래처럼 보이는 욕망은 사실은 엉켜진 실타래이기 보다는 늘 물질과 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뇌 속 세포의 분자구조이다.  

조금도 덜어낼 수 없도록 서로 엉키고 섞여 점점 바로 튀어나올 욕망의 본능들은 붉은 색으로 표현된다. 욕망의 덩어리들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금방이라도 화산처럼 분출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은 세포들이 욕망의 덩어리로 이미 변한다음 이것들은 심장을 타고 다시 혈류를 타고 온 몸을 돌며 성을 탐닉하게 하고 마침내는 머릿속 분자구조까지 바꾸어 버린다. 인간은 모두 욕망이라는 박테리아에 이미 감염되어 있고 다시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느낄 수 없을 유전자가 후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양심의 눈은 비껴 갈 수 없다. 눈 하나. 조용히 욕망의 덩어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욕망을 보며 그 안에서 조용하게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고 있는 작가의 눈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지금껏 담아 온 모든 것들을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열심히 보여주는 일이다. 이미 한 발을 내디뎠다. 

일시 : 3월7일(일)까지
장소 : 금호미술관
문의 : 010-9338-2606

에필로그

손이 빠져나간 뒤 장갑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채우던 따뜻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 빈자리의 허전함, 상실감 때문에 형체를 잃고 쓰러진다. 풀썩 주저앉는다. 더러 손을 뒤집어 까 보이며 돌아눕는다. 공처럼 몸을 말아 웅크리고 있기도 한다. 애초, 손을 위해 태어난, 삶이 맹목이었음을 느끼기도 하는가. 저마다 그림자를 깔고 앉는다. 한 결 같이 기름때에 절고 진창에 빠진 낙담한 낯빛. 딱딱하게 굳은 돌 하나씩을 가슴에 앉힌다. 스스로도 돌이 된다 // 여기 쌓여있는 목장갑 주검들. 서낭당처럼 수북한 무덤이여. 장갑을 거쳐 간 손들이여. 그대들 빌고 또 빌었던 꿈꾸던 세상이 과연 오기는 왔는가. - 詩 목장갑무덤. 作 김성호 

무거워 힘든 것만이 가벼워질 수 있어. 영혼의 무게만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었어. 길게 자기를 끌어안고 가는 나를 보고 있지. 조각난 하늘을 이고 숲이 이끄는 대로 몇 굽이를 오르고 있지만, 이 세상 끝이 산 너머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눈 덮인 계곡을 오르고 있어. 

덜컥. 눈 속으로 안겨. 이대로 버림 받아도 원이 없을 것 같은 흰 눈. 온몸에 쌓여가. 몸부림치며 털어내도 살갑게 달라붙은 눈발. 뜨거운 속을 다 꺼내 갈증을 풀어. 몸이 다 식어도 가슴에 내려앉은 눈발. 

산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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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2010-03-04 10:23:43
비가 많이 옵니다.. 이곳은.. 정말 반가운 그림을 봅니다. 감사합니다. 혹 책으로 출판 된다면 구입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현정 2010-03-02 20:27:34
몇 년 전 전시가 아직도 눈에 생생하네요.. 처음엔 불화인줄 알았는데 자세히보니 사회 비판적인 내용이 다분히 담아잇던 것을 기억합니다..인도에서 돌아오셧다니 앞으로는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 반갑습니다..이번 그림도 역시 너무 좋아요.. 구한 그림과 작가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