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이들의 감성을 앗아갔을까
누가 아이들의 감성을 앗아갔을까
  • 전영원
  • 승인 2009.10.16 2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영원 현산학원 원장

초등 6학년 독서 시간에 이오덕 선생님이 엮으신 「시골 아이들의 글 모음집」을 읽힌 적이 있다. 학교 육성회비를 못 내서 홀로 남아 화장실 청소를 했다는 대목에서 목이 메었다. 그럴 때, 말똥말똥한 아이들의 표정과 느낌 없는 감상문은 날 더욱 슬프게 한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독서시간, 「난 두렵지 않아요」라는 책이 있다. 카펫 다국적기업의 미성년 불법노동을 고발한 어린이를 카펫마피아가 총으로 쏴 죽인 실제 이야기다. 나는 힘주어 얘기 한다. 장사꾼에게 고용된 깡패가 죽인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소년의 육체를 쏠 수 있을 뿐. 소년은 어린이의 인권과 정의를 위해 당당히 희생한 거란다. 역사는 진실을 기억하므로 소년을 죽인 자들은 기억되지 않지만 소년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안 살아서 참 다행이다.”

이런 느낌밖에 못 갖는 아이들이 나를 씁쓸하게 한다.

문학은 문제풀이의 대상으로만 보는 아이들

고등부 언어영역 시간, 이청준의 소설 「눈 길」에 대한 수업을 할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

~큰 아들의 사업실패로 짐을 떠안게 된 둘째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새벽 눈 길, 속울음을 삼키며 그 아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와서는 부끄러워 차마 동네를 못 들어왔던 어머니~

이 대목만 읽으면 항상 먹먹해진다. 나는 가슴이 저리고 아픈데 아이들은 오로지 문제풀이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다.

또 현대시 시간에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가 나온다.

~왕궁의 음탕에는 침묵하면서 50원짜리 갈비에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식당 여주인이게 분개하는 나는 아무리 봐도 절정에서 한 발 비켜 서있다. 그게 비겁한 것이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모래야, 그런 내가 얼마나 작으냐~

라면서 시속의 화자는 탄식하고 절망한다. 

그 시를 읽으면서 선생인 나는 흥분한다. 김수영은 최소한 무엇이 절정이고 주변인지는 알고 있잖냐. 소심한 자신을 가리켜 본질을 벗어나 사소한 것에 매달리는 비겁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잖냐. 비겁한 소시민인 자신이 모래알보다 작다잖냐. 그런데 세상에는 절정과 주변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혹은 둘 다 똑같다고 우기는 양비론자도 많이 있어.

무엇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평가만 하려 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달려가는 선수인지도 모르면서, 마치 판단할 위치에 있는 심판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니까. 절정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해야 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울 거야.

그러니 절정에 설 자신이 없으면 절정에 있는 자들을 응원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근데 주변에 서 있으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는 그곳이 더 절정이라고 주장하니 미칠 일 아니냐! 화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그것 아니겠냐.

아이들의 순수를 빼앗어간 시대

내 얼굴이 붉어지고 침이 튀어도 갈 길 바쁜 우등생들은 “반어적 표현이 어디에 있고 이 시의 전개방식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낼모레가 모의고사니까 빨리 진도 나가자는 눈짓을 한다. 김수영 시인이 하늘에서 통곡할 일이다.

아이들의 눈물과 미소와 순수를 빼앗아간 점수만능, 물질만능 시대가 가슴 아프다. 여유 없이 질주만 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기성세대인 내가 도와줄 게 별로 없다는 것이 절망스러울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