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반성문
  • 전영원
  • 승인 2009.09.29 14: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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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원 현산학원장

초등학교 1학년 4월에 광주로 전학을 와서, 40년 이상을 광주 사람이라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이사한 것을 기억해보면 동구에서부터 광산구까지 모든 지역을 거쳤으니 결혼으로 5년 정도 시골 생활 한 것을 뺀다면 꽤 오랜 시간을 광주에서 산 셈이지요.

어린이날엔 아버지랑 사직공원 동물원에 소풍을 갔고, 오빠가 일고에 합격한 기념으로 온 가족이 충장로 입구의 ‘산수옥’ 모밀집에서 처음으로 외식이란 걸 했으며, 중학교 졸업식 날엔 무등 극장 옆 ‘대해수’에서 기막히게 맛있는 만둣국을 먹었습니다.

토요일마다 친구들과 충장로를 헤집고 다니던 여중 시절, 학생회관에서 단골로 공짜영화를 보면서 영화감독을 꿈꾸다가 고 1학년 때쯤 ‘화니백화점’의 출현으로 충장로 키드는 드디어 충파를 건너게 됩니다.

이만하면 제가 골수까지 광주사람이란 것을 충분히 증명한 셈이겠지요.
 
5·18이 나던 1980년도에 저는 전남대학교 1학년생이었습니다. 계엄령이 내리면 학교로 10시까지 모여야 한다고 해서 정문앞으로 갔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학우들이 시내로 달려 나가자 저러다 말겠지 싶어서 그냥 집으로 왔는데 바로 그 학생들이 5·18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그 때, 함께 하지 않은 것을 반성합니다. 

5월 26일, 친구 자전거 뒤에 타고 동명동 골목길을 달릴 때에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두 여대생이 싱그러운 5월 속을 달려 도청 앞으로 갔습니다.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분수대 위의 사회 보는 언니 오빠들과 하나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랑 동네 분들이 다함께 김밥, 주먹밥, 김치, 물을 시민군에게 전달하던 즐거운 날들은 그날로 끝나버렸습니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오니 빨리 도청으로 모여 달라고 절규하던 여자분의 목소리가 괴로워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죽여 울던, 비겁했던 저 자신을 반성합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시간, 또 다시 반성할 것이 있습니다.

‘아시아 문화 전당’을 짓기 위해서는 별관을 허물어야만 한다는 것을 새까맣게 몰랐던 것을 반성합니다. 문화 시설을 지하에 설계한다는 그럴듯한 얘기에 쏠려서 멋진 상상을 했습니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처럼 된다기에 인근에 있는 동명동의 오래된 한옥이라도 사두면 오르지 않을까라는 속물스런 생각까지 한 것을 미치게 반성합니다.

당연히 도청은 살아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해서 별관을 허물어버리는 설계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멋진 문화 시설보다 낡고 찌그러진 별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날 새벽, 별관에서 외로이 죽어간 자들과 그들을 기억하는 제게는 별관이 존재해야 하나의 도청이 됩니다.

제 탓입니다. 

저는 40년을 광주사람으로 살면서 주인행세만 하려고 했지 광주를 지켜줄 줄은 몰랐던 얌체 같고 못난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도청을 허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는 광주사람들을 만날 때에 그게 아니라고 항변 한 번 못한 비겁자입니다.

제 탓입니다. 애시당초 설계도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느긋하게 오해를 했던 제 탓입니다. 허물기로 한 별관에서 장기 농성을 벌이다가 가정이 깨져버린 사람들한테 미안합니다. 농성 때문에 공사가 늦어져서 생업에 차질을 빚고 있는 충장로 상인들한테도 죄송합니다. 설계대로 합의한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곤란해진 시민단체에게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침묵해버린 비겁자가 될까봐 머리 조아리고 반성문을 올립니다. 울고 있는 도청 별관, 생채기 나버린 광주 시민들, 지쳐버린 5월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내가 받아야 할 비난이나 책임을 돌리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일 뿐입니다.
 
# 위 내용은 신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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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2009-10-09 05:06:34
저도 반성합니다. 향쟁으로 상처입은 광주앞에 살아있는 우리 모두 비겁한 것이지요.
우리의 상징, 자존심을 훼손까지하는 댓가로 뭘 다른 것을 바랄 생각한 우리가 모두
반성해야 하지요. 잠시 넋을 놓았나 봅니다.

소소한 일상 2009-09-30 11:50:30
감사합니다. 저 역시 반성을 합니다.
같이 글을 읽었던 사무실 한 분이 와우~ 출마의 변이라고 하는 군요. 일반 정치인들보다 훨씬 강도높은 발언이라는 말과 더불어. 언제나 이 마음 그대로 간직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