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 윤영덕
  • 승인 2009.08.2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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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덕(전남대 5.18연구소 학술연구교수)

고(故) 김대중 전(前) 대통령께서 영면하셨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분의 ‘행동하는 양심’을 잃은 국민의 비탄은 크다.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위기라는 고달픈 시기에, 잇따라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 눈물겹다. 이제 “깨어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을 호소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두 분의 유업은 고스란히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기장에 남긴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는 글귀가 가슴을 친다. 고인의 인생관과 역사관이 묻어나는 이 글귀가 한편으로 마음을 무겁게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답답한 가슴을 씻어주는 청량제 같다. 수차례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역경 속에서도 분연히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투사’의 삶을 살았던 고인의 낙관적 신념이 읽혀진다.

고인의 아름다운 인생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실천으로 일군 것이었다. “인생은…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평범한 것 같은 이 말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을 실천하는 삶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고난의 역경을 헤쳐 온 그의 인생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고인의 역사 발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한다. 역사라는 거대담론 앞에서 쉽게 초라해지고 마는 나에게 개개인들의 가치 있는 삶들이 모여 역사의 발전을 이룬다고 말한다. 고인이 “피맺힌 심정”으로 말한 “양심의 소리에 순종하는 바른 생각과 행동”이 희망을 가능성으로 바꾸고, 또 그것을 현실로 만들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희망은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다. 나부터 바른 생각을 가져야 역사가 희망이 된다. 나부터 나서서 행동해야 희망이 현실이 된다. 지난 시기 우리가 피땀으로 일구어 온 민주화와 분단극복의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고통 받는 ‘백성’을 가엾게 여긴 ‘군주’가 베풀어 준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행동하는 양심들이 치열한 투쟁을 통해 어렵게 쟁취한 것이다. 두 세대를 훌쩍 넘겨버린 분단의 고통을 뛰어 넘어 통일의 길로 진입하는 것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단구조를 이용해 자기 잇속만 차리고자 하는 세력에 맞서 민족번영과 자주통일의 새시대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행동을 하나로 모았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 열 사람의 한 걸음

그래서 슬픔을 딛고 위기를 돌파해 나갈 힘도 우리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나의 정치적 상황은 관련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지금의 위기를 남의 탓으로만 돌려 버릴 수 없는 까닭이다. 애써 가꿔온 민주주의와 사회복지와 남북 평화공존의 흐름이 뒷걸음질 치는 작금의 현상은 행동하는 양심들의 조직된 역량이 ‘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겠지만 냉철한 우리 스스로의 자기성찰이 필요한 지점이다.

국가정책의 결정과정에서, 각성된 민중들의 역량이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 주권자의 의사는 번번이 무시되고 배제된다. 도도한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도 위기의 징후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다. 진보를 위한 투쟁이 사그라질 때 위기가 등장하고 반동이 머리를 내민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자면 일시적 현상이겠지만 그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서민경제를 실현하며, 파탄 일보직전의 남북관계를 복원할 힘은 ‘각성된 시민, 행동하는 양심’으로부터 나온다. 열 걸음을 내딛을 ‘영웅’ 한 사람보다, 서로 어깨를 겯고 한 걸음을 내딛을 열 사람의 아름다운 동행이 필요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남긴 글귀가 청량제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발전하는 역사와 부끄럽지 않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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