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됐어”
“아이들 울음소리 그친지 오래됐어”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9.08.2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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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구 마륵동 마지막 파수꾼 정현진 노인회장

▲ 광주시 서구 마륵동 정현진 노인회장.
“마륵(馬勒)이라는 지명은 말굴레의 형상을 따 붙여진 이름이여.”

정현진(73) 할아버지는 광주시 서구 마륵동의 파수꾼이다. 자손 대대로 마륵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터를 잡은 지도 100년이 넘었다. 과거 마륵동은 하남정씨(河南程氏)의 집성촌이었다. 현재 정 할아버지는 마을의 노인회장 일을 맡아 나름대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 앞 황룡강에서 고기도 잡고 다슬기도 잡았어. 피리 통 하나만 있으면 한나절도 못돼 매운탕 거리를 한가득 잡을 수 있었거든. 그렇게 물이 깨끗했어.”

옛 시절을 회고하는 정 할아버지의 얼굴에 잠시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을 앞 아파트 공사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심사가 영 마뜩치 않다.

“광주시장이 특급호텔을 짓는다고 자연녹지를 직권으로 풀더니 아파트를 짓고 있는 거야. 마을의 일부는 아파트 부지로 수용되고 나머지는 주택지로 묶여 있어. 컨벤션센터를 앞에 두고 마을을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는 거지. 우리도 똑같은 시민인데. 마치 아파트로 담장을 쳐서 낙후된 마을을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아. 그 때문에 마을공동체가 해체되고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해.”

그도 그럴 것이 마을주민들은 뚱땅거리는 소음과 온종일 씨름을 하고 있다. 어렵사리 만든 소방도로는 아파트 공사로 막혀버렸다. 상무지구로 열린 길이라도 내달라고 호소했지만  일언지하에 묵살됐다. 시장을 보기위해 양동시장까지 가야한다. 그나마 지하철 노선이 뚫린 것이 위안거리다.

“동네 사람들은 빨리 이곳이 개발돼서 다른 곳으로 이주했으면 하는 마음이여. 주민들이 공동으로 입주해서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지어달라고 건설업체에 요구도 해봤지만 쉽지가 않네 그려.”

게다가 주변 비행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이착륙하는 항공기 소음은 오래 묵은 체증과도 같다. 과거 어등산 쪽으로 향하던 비행항로가 황룡강 쪽으로 변경되면서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소음측정도 대여섯 차례 했지만 그때 뿐, 지금까지 바뀐 것은 없었다.

“비행기가 한번 지나가면 귀청이 떨어지고 문지방이 덜덜덜 떨릴 정도야. 이야기를 하다가도 전화를 받다가도 대화가 중단되곤 하지. 공항을 이전한다는 소리가 오래전부터 나왔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어.”

정 할아버지의 한숨소리가 깊다. 그런데도 소송은커녕 변변한 문제제기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간혹 민원도 제기해봤지만 국책사업이니 시책사업이니 하는 무성의한 답변만 되풀이됐다. 정 할아버지는 이를 젊음의 부재로 돌렸다.

“여기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친지 오래됐어. 제일 젊은 사람이 예순 셋이여. 마을 농지와 토지도 대부분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어. 자연마을로서 수명이 거의 다된 거나 마찬가지지.”

최근에는 하나뿐인 마을정자 우산각으로 가는 길까지도 막혀버렸다. 마을 땅을 매입해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사유지라며 정자입구를 봉쇄해버린 것. 정 할아버지는 최근 세태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젊은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으면 마을에 정자라도 하나 지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있는 정자도 가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막아버렸어.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인정이 너무 박정해.”

그 때문에 정 할아버지는 ‘개발’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인 아파트의 분양이 잘되면 마을 부지를 수용하겠다는 건축업자의 말 한마디에 목을 매고 있는 형국이다.

“뭐 늙은 사람이 별다른 소원이 있겠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5평짜리 공동아파트 하나 지어서 마을사람들이 여생을 같이 할 수 있게 해줬으면 더할 나위 없겠구먼.”

개발의 미망(迷妄) 속에 소중한 마을공동체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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