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었지만…풀지 못한 의문사
20년 넘었지만…풀지 못한 의문사
  • 강성관 기자
  • 승인 2009.04.29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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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철규 의문사 20주기…진실화해위 조사 중

망월동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역 묘지번호 ‘28-2’.

1989년 5월 광주 제4수원지에서 얼굴도 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채 변사체로 발견된 이철규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당시 검찰은 “수배 중이던 이철규가 경찰의 검문을 피해 달아나다 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최종 발표 했지만 유가족과 재야민주세력은 “고문에 의한 타살” 의혹을 제기, 사인 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 진상규명 운동 당시 “자장면을 먹었는데 콩나물이 왠말이냐”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로 ‘고문에 의한 타살’혐의가 짙었지만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의혹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78일간의 전 국민적인 진상규명 요구 투쟁,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의 진상 규명 활동,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조사 시작, 2002년 9월 의문사규명위 ‘조사불능’ 결정, 2007년 11월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개시….

이렇게 20년이 흘렀다. 다만 2004년 민주화 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 대상자로 결정된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해 마다 이 자리에 서면 ‘내년에는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추모식을 치를 수 있겠다고 기대했지만 오늘 부끄러운 모습으로 열사 앞에 서게 됐다”. 문병란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 회장이 어느 해 추모식에서 했던 추도사다. 오는 5월 6일 있을 20주기 추모식에서도 다르지 않게 됐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개시한 지 1년 6개월이 흘렀지만 큰 성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철규 열사 추모 20주기 행사위원회’ 한 관계자는 “당시 안기부의 개입 사실 등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의문사규명위 조사 보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이 없어 답답하다”며 “그래도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이철규 열사 사망 사건은 ‘고문에 의한 타살과 사체 유기’ 의혹을 ‘사실’로 만들어 낼 만큼의 확실한 증거와 양심선언이 뒤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과 재야단체 등은 ‘애국학생 고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를 발족하고 서울 명동성당에서 600여명이 단식농성을 벌이는 등 ‘진상 규명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의혹만 남긴 채 ‘진상규명투쟁’ 178일 만인 11월 4일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이후 ‘이철규 열사 추모사업회’는 진상 규명을 위해 거액의 보상금을 걸고 제보자를 찾고 “제발 이제는 양심선언을 해 달라”고 당시 공안 당국 관계자들에게 호소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철규 의문사 사건은=조선대생 이철규(당시 25세)는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을 지내면서 창간호에 게재한 자신의 논문 ‘미제침략 100년사’ 등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전남지역 공안 합수부에 의해 수배 중이었다. 이철규의 검거는 300만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이 따라 붙었다.

수배를 받고 있던 그는 1989년 5월 3일 오후 10시경 동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광주 인근의 호반산장으로 가던 중 광주시 청옥동 제4수원지 청암교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는 1주일 후인 5월 10일, 검문을 받던 청암교로부터 76m 떨어진 곳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시신의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 있고, 온몸은 시뻘겋게 짓이겨지고 찟겨져 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가슴과 팔목, 주먹 쥔 손에는 피멍이 맺혀 있었다. 시신을 처음 검안한 김세현(당시 광주 북구보건소 의사)씨는 “눈이 튀어나오고 입가의 상처가 생긴 원인도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순한 익사체는 아닌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검찰은 관련조사와 부검결과를 종합하여 ‘실족 후 익사’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범국민위원회는 검찰이 밝힌 추락지점은 심수(1.5m)가 낮고 등산객 등 통행이 잦은 곳으로 7일 후에야 발견되었다는 점, 익사라면 위장과 폐장에서 익수가 발견되어야 하고 흙탕물의 흔적이 있어야 하지만 매우 깨끗했다는 점 등을 들어 ‘고문과 구타에 의한 살인’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의문사규명위 조사 결과,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의 전신)가 이철규 수배는 물론 조선대 학생회 움직임 등 수사 과정에 깊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故 이철규는 전남 장성군 삼서면 관동부락에서 태어나 1982년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 한 뒤 당시 박철웅 이사장의 족벌운영 체제에 반대하는 학내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그는 84년 ‘조선대 민주화자율추진위원회’ 위원, 이듬해에는 ‘반외세 반독재 투쟁위원회’를 결성, 활동하다 구속수감돼 2년여 동안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87항쟁에 뒤이은 6·29선언 이후 가석방돼 재입학해 88년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창간호에 ‘미제침략사 100년사’를 게재하고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벌여 수배를 받던 중 89년 5월 3일 광주 제4수원지 삼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받은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0일 변사체로 발견됐다. 유가족과 추모사업회는 ‘고문에 의한 타살’로 보고 그가 5월 6일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 해마다 5월 6일 추모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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