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운동 서막 알린 첫 봉화
반미운동 서막 알린 첫 봉화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7.11.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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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현대사 Ⅱ]⑤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 광주시 동구 황금동 소재 미문화원은 1980년 12월 9일 정순철, 임종수 등에 의해 첫 방화가 이루어진 이후 대학생들의 단골 기습시위 장소가 됐다. 광주 미문화원은 30회 이상 잦은 시위로 1989년 5월 잠정 폐쇄되는 운명을 맞는다.
5·18 이후 미국에 대한 배반감 표출
전기누전·영웅심리 발로로 의미 축소

광주학살의 참상으로 온 도시가 몸서리치던 1980년 12월 9일 옛 전남도청 옆 광주미문화원 건물(지금의 황금주차장 자리)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를 비호하는 미국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언론을 장악한 군사정권의 철저한 통제로 5공화국 말까지 바깥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은폐되었다. 경찰은 ‘부랑아들의 영웅심리에 의한 불순행동’으로 사건을 몰아 시국사건이 아닌 현주건조물 방화로 사건을 축소시켰다.   

그로부터 2년 뒤 김현장, 문부식 등이 주도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줄여서 부미방)이 터지면서 비로소 항간으로만 떠돌던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이하 광미방)의 실체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광미방은 5·18을 최초로 기록으로 정리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남사회운동협의회·황석영 편저. 풀빛출판사)’에서 부미방과 함께 ‘누구도 문제로 제기하지 못했던 미국과 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대하여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촉발시킨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압제의 세월 침묵의 시대

▲ 정순철씨는 1년 반 동안의 도피생활 끝에 체포돼 징역 5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정 씨는 49세의 나이로 지난 2004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참혹한 기억과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5·18이후 광주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치를 떨었고 치욕스런 삶을 더 산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극심한 허무주의를 앓는 도시였다.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감시로 사람들은 더욱 더 안으로만 침잠했고 삼삼오오 모이는 연례행사마저도 기관원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고 있었다.

숨죽이던 도시가 다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해 12월 5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주최로 광주 호남동 성당에서 추수감사제 및 농민대회가 열리면서부터.

당시 가농 전남연합회 총무를 지냈던 노금노(57)씨는“5·18이후 기획된 첫 대중집회로 광주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만방에 알리고 제2의 광주항쟁을 도모하자는 취지도 있었다”며 “그러나 농민들의 참석률 저조와 약속된 학생들의 시위가 무산되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는 대부분 검거되거나 도피중이어서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조직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다시 12월 10일 2차 농민대회가 계획되었으나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농 광주분회를 결성해 활동 중이던 정순철(당시 25세), 김동혁(당시 44세. 전 가농전남연합회장), 임종수(당시 21세) 등은 12월 6일 한 술집에 모여 대책을 숙의했다.

이들은 대중적인 집회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의 인원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마침 브라운 미국 국무장관이 방한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고 9일을 D-day로 잡아 광주미문화원 방화를 결심하게 된다.    

파장 우려한 당국, 언론통제로 쉬쉬

8일 밤 사전답사를 한 뒤 윤종혁(당시 26세)과 박시형(당시 22세)이 거사당일인 9일 추가로 합류했다. 밤 10시경 정순철과 임종수가 휘발유와 석유 각 1통, 펜치 등을 들고 미문화원으로 향하고 나머지 3명은 망을 보기로 했다.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미문화원 담장의 철조망을 자르고 지붕으로 올라 기왓장을 몇 장 들춰내고 기름을 부었다. 시멘트 포대 종이를 말아 불을 붙인 도화선을 기름에 던져 넣고 문화원 옆 여관지붕을 타고 입구를 빠져나 오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석유통을 들고 광주공원으로 오르는 길에 시가지를 뒤덮은 연기를 보고 소방차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처에서 간단한 회합을 가진 뒤 다음의 거사를 준비할 때까지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만남을 금하기로 했다.

이들은 애초 대구, 부산, 서울의 미문화원을 연쇄적으로 타격한다는 계획아래 방화를 한 이유를 유인물 등으로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12.10 농민대회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수사당국에 임씨가 검거되면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경찰은 광주 봉기의 진상규명과 전두환 일당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함이라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영웅 심리에 의한 우발적 행동으로 몰아붙였다.

2심까지 가는 재판에서 임씨는 2년6개월의 실형을, 나머지 3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82년 부미방의 배후로 지목돼 도피생활을 하다 검거된 정씨는 징역 5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단골 시위 장소된 미문화원

당시 운동세력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광주학살의 책임을 미국에 묻는 첫 시도였을 뿐 아니라 테러 형태를 띤 저항운동의 경험도 생소한 탓이었다.

방화사건 다음날 신문은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라는 사회면 1단짜리 기사를 실었다.

임씨는 광주 미문화원장 스티븐슨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항소이유서에서 “비록 방화라는 범법행위로 이 법정에 서 있으나 이 자리에 서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군부정권이다. 백주대낮에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것은 국가안보란 미명하에 정당화되고 폭력적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우리만이 법정에 서야 한단 말인가”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미문화원 방화와 점거농성은 82년 부미방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의 단골 소재로 자리잡았다. 부미방의 김현장은 어느 자리에서 광미방으로 3천만 원의 현상수배가 걸린 정순철의 지명수배명단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한편 광미방에 참여했던 5명의 인물들 중 김동혁 씨는 경찰조사를 받는 동안 물고문과 심한 구타로 인한 고문후유증으로 3년 정도를 시름시름 앓다 작고했으며 정순철씨 역시 서울에서 수산물 회사를 차려 운영하다 지난 2004년 간암으로 별세했다. 윤종혁씨는 전 함평군 의원을 지냈고 박시형씨는 함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유일한 대학생이던 임씨는 광주시청 공보실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역사의 주인은 나"
[인터뷰]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주인공 임종수씨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군인들이 죄없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는 사실은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폭거요 만행이었다.

그에 맞서 항거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던 평범한 사람들이 졸지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는 임씨에게도 마찬가지 경우.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임씨 역시 봉사서클 KUSA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던 평범한 젊은이었다. 5·18만 아니었더라면 순조롭게 취직해 평탄한 삶을 살았을 거라는 임씨는 5월 21일 도청 앞 발포현장에서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에 빠진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성당에 나가 기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역사의 진실과 허구를 분명히 깨달았으나 같이 피 흘려 죽지 못하는 비겁함과 나약함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지요. 가농 광주분회는 몇몇 이들이 뜻을 모아 그렇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당시 학생 지도부는 대부분 죽거나 감옥에 갇히고 아니면 도피생활을 하던 때라 5월 이후 저항운동이 조직적으로 준비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9월 초 새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할 당시 금남로에 세워져 있던 대형 아치에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붉은 페인트로 쓴 사건 등이 고작이었다.

광미방은 조직적으로 준비된 저항운동은 아니었으나 군사정권과 언론에 의해 여전히 폭도로 억울하게 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때고 발생할 여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다.

임 씨는 “광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고 적은 수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며 “5·18의 배후인 미국을 상징하는 미문화원을 타격해 국내외에 알려내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사법당국의 의미축소와 언론의 통제로 묻히고 말았지만 향후 부미방(82년 3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85년 5월) 등 반미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다.

임 씨는 마지막으로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는 역사의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며 “평범한 내가 주인으로 나서 선택할 때 역사는 한 발씩 전진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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