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보수의 늪’에 빠지다
광주, ‘보수의 늪’에 빠지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10.0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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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 연작칼럼]혼돈의 문화수도 ⑤왜 '민주'가 아닌 '문화'인가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광주전남의 시민운동단체들이 ‘문화수도’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2003년 4월, 광주전남시민단체협의회 워크숍에서 결정된 일이다. 이 방침은 슬그머니 철회됐다. 왜 입장을 바꾸었는지는 공식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다만 민주당 관계자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만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 간에 시민운동진영은 바보짓을 했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는 ‘바보짓’이란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옳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이고, 둘째, 자기들이 손해 볼 일을 했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옳은 일을 위해 자기 손해를 감수한다. 나쁜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잘못된 일도 저지른다. 그런데 잘못된 일을 손해봐가면서 했다면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한 도시의 컨셉은 그 도시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해야 한다. 미래 지향적인 의미도 담아야겠지만,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지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컨셉이 다른 지역에서도 설득력을 갖는다. 

광주의 근현대사에서 최대 사건은 80년 5.18이다. 남종화와 판소리, 그리고 다양한 현대문화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80년 5.18에 비길 수는 없다. 5.18은 단순히 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에 한정된 사건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쌓아온 민주의 열망이 분출된 결과이고, 이후에도 계속 우리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역사다. 당시 광주를 살았던 ‘모든’ 시민들이 5.18에 대한 나름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광주가 ‘민주 도시’라는 컨셉을 버리고, 갑자기 ‘문화수도’가 되었을까? 나는 광주보수 세력의 전략적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는 오랫동안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왔고, 두 차례 민주정권을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광주 내부적으로는 한 번도 진보 진영이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 보수 세력들은 여전히 공고한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광주의 보수 지배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과정에 기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화의 반대 진영에 서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광주의 민주화’는 편치 않은 상상일 수 있다.  광주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면, 그들은 의제 주도권을 잃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의제’를 잃으면, 대중의 지지를 잃는다.

그  불안감이 ‘문화수도’라는 컨셉을 만들어내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가 아니라 ‘문화’라는 의제는 그들이 계속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시민운동진영까지 덩달아 나섰다. 그 결과 진보 진영 약진의 최대 기회였던 ‘참여정부’시기는 하릴없이 흘러가버렸다.

‘문화수도’ 논의의 주도 세력을 분석해보면 이런 주장의 타당성은 분명해진다.

광주시의 문화수도 논의는 대부분 관료와 보수적 문화인, 그리고 구시대 보수층이 주도하고 있다. 시민운동진영의 목소리는 그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형식은 많아 달라졌지만, 본질은 아스팔트 위에서 성명서를 읽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앙 정부 쪽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수도 논의 초기에는 일부 운동권 출신들이 문화수도 논의의 일정 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폐쇄적이고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주도권을 모두 상실했다. 이제 주도권은 관료와 보수적인 문화인들에게 넘어 갔다.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장과 추진 기획단장 모두 관료출신이 차지했다. 조성위원 15명 대부분도 보수적 인사들로 위촉됐다. 민주화 운동 경력을 가진 사람은 많이 잡아도 4명 정도, 구색 갖추기 수준을 넘지 못한다.  

대부분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과 비교하면 문화중심도시추진위원회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

보수적 성격이 강한 광주시도 민주주의전당유치위원회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 중심으로 구성했다. 광주가 계속 ‘민주도시’라는 컨셉을 강화해 갔다면, 시민운동 진영이 광주 시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시민운동 진영은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광주시의 도시 컨셉을 ‘문화’로 설정하면서 빼앗긴 것은 ‘의사 결정과정 참여 기회’ 만이 아니다. 지역 사회 논의의 중심 의제도 모두 보수 진영으로 넘어갔다. 시민운동 진영까지 ‘보수의 의제’를 열심히 토론하고 있다.

더 이상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민주화 운동의 경험을 세계와 나누는 일도 일부 실무자들에게 맡겨졌다.

문화 분야에서도 진보 진영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민의 삶을 어떻게 문화와 연결시킬 것인가’의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 자리를 과거 보수 진영의 주제들이 파고들었다. 예산 문제, 산업 육성 문제, 도시 계획 문제들에 시민·문화운동 진영까지 골몰하고 있다. 시민운동 단체들은 ‘문화의 전당 주차장을 어디에 설치하느냐’는 문제까지 붙들고 열심히 토론하고, 조정했다. 

의제를 빼앗기는 것은 지역 사회의 정치 지형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다. 지역민들의 관심이 모두 보수적 의제에 쏠리게 되면, 지역 사회는 점점 더 보수화되고, 운동 진영은 결국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광주의 시민운동 진영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올바로 잡았던 방향을 놓쳐 버린 뒤, 시민운동 진영까지 나서서 ‘보수의 주제’를 열심히 토론하고, 그 결과 보수 지배 블록은 더욱 공고해지고 진보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보수의 늪’에 광주가 점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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