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저널리즘의 시대
황색 저널리즘의 시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09.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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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밝아오니]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신정아 씨의 알몸 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갈레로 나뉜다. 한 쪽은 ‘학력위조 등 불법을 저지른 것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여성의 누드 사진을 본인 허락 없이 싣는 것은 엄연한 인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드 사진이 신 씨의 범죄사실을 입증하는 주요 증거라서 신문에 실었다는 이용식 문화일보 편집국장의  해명은 ‘뻔뻔한 궤변’이라고 분노한다. 언론 관련 시민단체와 여성계가 대체로 이런 시각에서 문화일보의 황색 저널리즘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신정아라는 희대의 ‘구미호’가 성적 로비를 포함한 각가지 수법을 동원하여 청와대 정책실장과 동국대 총장, 광주 비엔날레 이사진 등 유력인사들을 ‘홀려’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꼬리가 밟혔는데, 그까짓 사진 좀 공개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이들은 누드 사진이 이를테면 ‘구미호의 꼬리’에 해당된다면서 문화일보의 입장을 옹호한다. 

문제는 이같은 ‘구미호 괴담’이 ‘전설의 고향’에서 드라마로 방영되지 않고 주요 신문과 방송의 기사로 보도되는 우리의 언론 풍토에 있다. ‘강안 남자’ 같은 포르노 연재소설로 일찍이 황색 저널리즘을 표방한 문화일보가 알몸사진을 실은 것은 어떤 점에서 편집의 일관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론지나 공영방송을 표방하는 다른 매체들도 알몸 사진을 싣지 않았다 뿐이지 확인되지 않은 온갖 소문과 추측을 사실인 양 보도하는 점에서는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황색 저널리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은 항상 말초적 자극에 민감하다. 이러한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판매부수를 늘리고 시청률을 높이고 싶은 유혹에서 초연한 언론매체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런 매체는 원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무한경쟁시대에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수 없듯이, 정론직필(正論直筆)을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언론은 독자나 시청자, 광고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판매부수가 많은 신문들이 대개 옐로우 페이퍼이고, 이른바 정론지들은 독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렇지만 신뢰도나 영향력은 이른바 정론지들이 훨씬 높은데, 이것은 정치인이나 관료, 교육자 등 여론주도층이 정론지들의 보도를 믿고 이를 판단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선정적 보도에 매달리는 신문이 판매부수도 많고 여론주도층의 신뢰를 얻어 ‘정론지’로 인정받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는 정치인이나 관료, 교육자 등 여론주도층이 황색 저널리즘을 애독하고, 확인되지 않은 선정적 기사를 사실이라고 믿거나 우기기 때문이다. 정당의 대표나 대변인, 국회의원, 검찰, 변호사, 교수, 교사 등이 대부분 황색 저널리즘의 보도를 사실로 믿거나, 믿지 않으면서도 그 영향력 때문에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다고 말하면 ‘명예훼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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