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문, 환영하지만...
결의문, 환영하지만...
  • 곽규호 기자
  • 승인 2007.08.03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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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의 눈]곽규호 편집부장

열일곱살에 끌려간 장흥의 여 할머니. 낮잠 자다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끌려가 2년여 일본군 성노예로 살았다. 천진에 도착한 첫날부터 군인들을 받았다. 밑이 찢어져 피가 나고 부었다. 아프다고 해서 하루는 쉬었지만 곧바로 군인들이 들어와 쓰리고 계속 부어 있었다. 하루에 20~30명을 상대해야 했고, 주말에는 더 많았다. 폭판 파편에 맞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퇴원 후에는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회 엮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1997년4월 도서출판 한울 발간) 에는 30여명의 우리 할머니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인간적으로 일본군들의 성 노예로 살았는지가 적나라하다. 차마 맨 정신으로 그들의 증언을 들을 이 누구이겠는가.

숨길 수 없는 비참한 역사

매주 수요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소속 회원들과 할머니들은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에서 항의집회를 갖고 있다. 1992년 1월8일부터 시작된 이 집회는 벌써 15년이 넘도록 진행돼 왔다. 정대협 할머니들이 요구해온 것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및 진상규명, 국회 결의,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이다.

종로에서 열린 750여 차례 집회는 서울이나 도쿄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워싱턴에서 메아리로 돌아왔다. 지난 달 30일 미 하원은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결의안을 본회의에 공식 상정, 토론 35분 만인 오후 3시11분(한국시각 31일 오전 4시11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결의문이 채택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보도이지만, 기실 이같은 결의문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채택된 적이 없다는 데서 더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갖지 못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2차 대전 후의 태평양전쟁 전범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쿄 전범재판은 일본이 20세기 들어와 아시아 전역에서 저지른 모든 범죄와 비행의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아키토는 전후 40여년 동안 멀쩡히 전쟁과 무관하게 천황이었고, 731부대의 생체실험이나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들어서야 그 실체가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키시마마루 폭침, 관동대학살 등도 재판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팽창 속에서 일본을 자산으로 여긴 미국의 의도로 철저한 전범 재판이 실시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미국이 먼저 나선 것은, 그러므로 뒤늦어도 한참 뒤늦고 앞뒤가 맞지 않지만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어정쩡한 입장이 한국 정부이다.

미국의 뒷북, 한국은?

미 하원이 결의안을 통과시킨 그 날 민병두 의원 등 10여명의 국회의원이 성명을 냈다.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 아베 총리는 무릎 꿇고 사죄하라 등 4 개 항목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 요구가 일본 정부에 제대로 배달됐을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요구사항이나 여전히 법적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일제 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에 대해 깊이 연구했는지도 의심스럽다.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일본이 한국에 전달한 유상 3억달러, 무상 3억 달러의 자금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그 자금이 왜 일제 하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가. 어떻게 해야 정대협 할머니들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정부와 학계의 깊은 연구는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지난 5월31일 일본 나고야 고등법원은 일제하의 여성근로정신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이 일부 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패소했다. 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 핑계였다. 최봉태 변호사는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 부분을 파기해주기만 해도 일본정부로부터 직접 구제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20억원씩이나 들여서 강제동원 피해자 추모시설을 짓는 것은 그 다음에나 이야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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