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을 제대로 기념하라
기념일을 제대로 기념하라
  • 곽규호 기자
  • 승인 2007.04.2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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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의 눈]곽규호 편집부장

우리 나라는 참으로 기념일이 많다. 공휴일도 많다. 주 5일 근무가 시작되면서 어지간한 회사에서는 연간 110일 이상이 휴일이다. 그 가운데 법정 공휴일이 15일, 이를 포함한 각종 국가기념일에 따른 공휴일 수는 66일다.

설과 추석 명절, 5천년 역사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개천절,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제헌절, 석가와 예수의 생일, 식민과 독립의 기억이 담긴 삼일절과 광복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법정 공휴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광복 이후의 중요한 사건으로 인한 공휴일은 하나도 없다.
한때는 4·19 의거일도 휴일이었는데, 기념일로만 남은 지 오래다. 군부 독재시대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도 제대로 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막았다.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그은 5·18광주민중항쟁은 기념일로 지정됐을 뿐 공휴일은 아니다. 6·10항쟁에 이르는 많은 민주화 기념일들의 신세가 그렇다.

대통령, 4·19기념식 처음 참석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9일 4·19 기념식에 참석했다. 취임 이후 대통령으로서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노 대통령은 “4·19의 역사적 의의와 비중에 비추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관행으로만 알고 몇 해를 기념식과는 별도로 아침 참배만 했다”며 “그동안 정통성 없는 정권이 해오던 관행을 생각 없이 따라 해왔던 일이 무척 부끄럽고 미안해, 뒤늦게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대통령이 ‘4·19 묘지에 참배만 하고 기념식은 참배하지 않은 관행’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4·19 정신이 헌법에까지 명시돼 있지만 기실 그간의 대통령들은 그 정신을 계승할 생각이 없었던 것, 기념일을 기념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관용과 책임’ 광주에 절실

이날 노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관용과 책임의 정치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관용과 책임이라는 분석은 작금의 광주 전남 상황을 보면 피부에 와 닿는다.

지난 해부터 광주시청 앞 마당에서는 연일 집회가 열리고 있다. 물론 지난 해 11월엔 건물 창문을 부수는 등의 폭력 시위가 열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집회는 회사의 횡포에 의해 해고된 노동자들이 시장의 중재를 바라면서 열리는 것들이다. 장애인학교의 교사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자녀의 부모가 와서 항의하고, 이동권 확대를 요구하는 장애인들이 모이기도 한다. 시청 내에서 일하던 청소 일용직 아주머니들의 시위도 열렸다. 누군가는 들어줘야할 목소리들이었다.

그러나 한국 민주화운동의 메카라고 불리는 광주의 자치 수장과 공무원들은 이들을 몰아내거나 손해배상 등으로 고발하는 수준이다.

다시 기념일을 기념하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광주시장과 시의원 등은 매년 5·18기념일이면 망월동 국립묘역을 참배한다. 물론 4월19일엔 광주공원 4·19탑에서 기념식을 가졌을 터이다.

기념일이 기념일인 이유는 뭔가. 단순히 현장에 한 번 모이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4·19에는 4·19의 정신이 있고, 5·18에는 5월광주정신이 있으니, 그 정신을 정치 현장, 삶의 현장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의 날이 기념일이다. 그 정신이 정권연장 기도가 담긴 독재에 항거하고, 국민을 군화발로 짓밟은 학살에 저항하게 했다. 그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앞당겨졌고, 그 정신으로 낮은 목소리가 권력자를 끌어내리기도 하고 권력자를 만들기도 했다. 경제 권력, 사회 권력에 소외당하고 호소할 곳 없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책임지지기는 커녕 고발하는 정신은 어느 나라의 어떤 기념일 정신인가.

지금 광주에서 기념일을 제대로 기념하는 일, 그것은 대통령의 말처럼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일일 수 있으며, 관용과 책임의 정치문화가 시민 일상의 삶에서 꽃피고 전국적으로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일일 것이라 믿는다.

기념일, 제대로 기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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