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는 상처, B·C급 전범자
아물지 않는 상처, B·C급 전범자
  • 이국언 기자
  • 승인 2007.03.08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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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강제차출‥전범취급, 23명 사형 125명은 지역형

1948년 5월 3일 전 일본 수상이자 육군대장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것을 끝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제국주의 일본군을 이끌며 동아시아 민중을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한 지도자의 말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A급 전범은 7명이었다.

전범으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단지 일본인만은 아니었다. 36년간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도 그 중 일부였다. 을사오적 얘기가 아니다. 식민지 시절 강제동원 피해자이면서도 지금까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가슴앓이를 해 온 사람들. 일제 부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 온 조선인 ‘B.C급 전범자’들이 그들이다.

조선인 출신이 어떻게 전범자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B.C급 전범자를 다시 들춰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해자 일본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조국으로부터는 일제부역자라는 오명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 B.C급 전범 피해자들을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 지난해 10월 5일 86세를 일기로 작고한 정영옥씨의 장례식 자리에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BC급 전범 피하자 단체인 동진회 회원과 그 유족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된 정씨는 청남 부여 출생으로 7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았다.  
 
일본, ‘외국인’이라며 보상 외면...고국에선 일제부역자 취급 냉대

피비린내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 선언(1945년 8월 15일)으로 막을 내리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은 곧바로 전후 전쟁범죄자(전범) 처리 문제에 착수했다.

전범은 범죄 형태에 따라 크게 2가지 종류. 그중 가장 무거운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A급 전범들이었다. 맥아더가 지휘한 국제 군사법정 도쿄재판은 ‘전쟁지도자 28명’을 A급 전범으로 판결하고, 전 수상이자 육군대장이었던 도조 히데키 등 25명(병사자 3명 제외)에 대해 전원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중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16명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A급 전범을 제외한 B·C급 전범들은 특별한 구분은 없었다. B·C급 전범재판은 1945년부터 1951년에 걸쳐 요코하마, 중국, 동남아시아 등 총 7개국 49개 재판소에서 이뤄졌다. B·C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람은 5,700명으로 이중 984명(50명은 감형)이 사형선고를 받아, 934명이 처형됐다. 징역형을 받은 전범 중 종신형은 475명, 유기징역은 2,944명으로 대부분 10년 이상의 중형이었다.

전범자로 기소된 5,700명 중에는 조선인 148명과 대만인 173명이 포함돼 있었다. 일제 침략전쟁의 피해국 국민이면서도 전범자의 대열에 올려진 것이다.

일제는 1941년 말부터 전선을 태평양 일원까지 확대해 갔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반도 상륙으로 태평양 전쟁을 개시한 일본은 이후 마닐라(1942년 1월), 싱가포르(2월), 자바(3월), 필리핀(5월)을 차례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점령지역의 확대는 자연히 포로문제로 이어졌다. 이들 지역을 식민지로 두고 있거나 전쟁에 참여한 영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미국 등 연합군 병사들로 그 수는 26만여명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포로감시원으로 대만인과 조선인을 활용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경계에 필요한 병력부담을 덜기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전후 문제가 불거질 경우 적군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포로감시원들에 대한 책임소재를 전가시키려 한 것도 그중 한 이유였다. 교활한 식민정책의 수법이었다.

1942년 5월부터 포로감시원 모집에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모집형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총독부가 각 읍면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면서기와 순사들을 앞세워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일부 지원도 없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징병제가 결정된 때로, 이미 많은 청년들이 탄광이니 군대로 끌려가는 판국이었다.

도로공사에 깃발을 흔드는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배급을 중지하겠다는 반 강제적 협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자원하기도 했다. 19살부터 23살까지의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동원된 3,223명의 조선 청년들은 군속 신분임에도 부산 서면의 노구치(野口)부대에 수용돼 2개월간 사격과 총검술 등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9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이들이 배치된 곳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뉴기니아, 미얀마, 태국 등 각처의 포로수용소. 일본군을 대리한 감시업무였다.

▲ 한국인 군속들이 타고있는 '싸무로'라는 삼륜차. 운전수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이 교통수단은 1940년대 태국에서 가장 널리 이용됐다.
전쟁의 승패는 때로 극과 극으로 통하는 법.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연합군 포로들은 침략전쟁을 저지른 일본군 보다 우선 자신들이 직접 대면했던 조선인과 대만인 포로감시원들을 지목하고 나섰다. 포로학대자로 몰려 줄줄이 전범 대열에 서야 했다. B·C급 148명중 129명은 포로감시원이었다. 나머지 19명중 1명은 군인, 그 외 16명은 중국 통역요원, 기타 2명이었다.

재판은 판사, 검사 외에 변호인도 재판을 주최하는 연합군 측이 선임했다. 증인도 검사 측에만 있었고, 피고인에게 진술의 기회도 주지 않는 법정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통역 없이 진행되는 법정마저 있었다. 많은 피고들이 사형으로 내몰렸다.

전범재판은 개최국에 따라 양상은 달랐다. 1949년 12월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재판에서는 731부대 등의 세균병기에 관계된 12명이 재판에 회부됐지만 사형판결은 없었다. 사형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영국, 네덜란드 등의 재판에서는 전범 처형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연안의 식민지를 일본에 빼앗겼던 데 대한 심리적 반감이 적지 않게 작용한 때문이다.

뒤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을 채찍질하며 자신들을 대신해 악역을 시킨 일본은 하나같이 발뺌하고 나섰다. 148명중 23명이 사형을 언도받고 현지에서 처형되고 125명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광주전남 출신 26명 가장 많아...진상규명위, 뒤늦게 ‘피해자’ 인정

이들의 출신지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60.4%로 당시 인구 분포 46%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중 가장 많은 출신지는 전남으로 26명(17.7%)이었다. 경상북도가 18명(12.2%)으로 그 뒤를 이었다.

교수형을 당한 총 23명 중 군인은 미국재판에서 처형된 홍사익이 유일하다. 패전 당시 일본 남방방면군 사령부 병참부총감이었던 그는 1944년 3월 미군 포로들을 관리하던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중장)으로 임명된 바 있다.

조선인 출신 B·C급 전범은 현지 법정에서 처형되거나 남방 각지의 전범형무소에서 몇 년간 복역한 후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져야 했다. 최후의 BC급 전범 18명이 출소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일로부터 6년 후인 1958년 5월 30일이었다.

전범의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대부분은 일종의 가석방이었기 때문에 형기가 끝날 때 까지는 일본을 떠날 수도 없었다. 종전 10여년이 훌쩍 지났건만 이들에게 해방의 감격은 먼 나라 일에 불과했다.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되면서야 처음 일본 땅을 밟아봤을 만큼 일본 생활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이었다. 상실감과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이중 3명이 병사하고 2명이 자살했다. 포로감시라는 가장 더러운 일에 실컷 이용해먹었던 일본정부는 원호법에 따라 일본인 군속 및 전쟁피해자들에게 조의금, 가족연금 등을 지급하면서도 이들 피해자들에게는 ‘외국인’ 이라는 이유로 일체 지원대상에서 조차 배제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가장 큰 상처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제부역자’라는 오명 때문이다.

1995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가 주축이 돼 일본 동경지방법원에 명예회복을 위한 재판을 청구했지만 2001년 동경 최고재판소에서 기각되고 말았다. 노구를 이끌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고발했던 무안출신 이의도씨 등은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그 뒤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사형이 집행된 14인의 유골이 일본으로 옮겨져 1959년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송환됐다. 홍사익 등 미국과 중국법정에서 사형된 9인에 대해서는 아직 유골의 존재여부조차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일제강점하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11월 피해신고를 접수해 온 86명중 83명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했다. 진상규명위 이세일 팀장은 “B·C급 포로감시원은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피해자 범주에 속한다”며 “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전가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한편, B·C급 국내 생존자는 진도출신의 이영환씨를 비롯 2명, 일본 거주자는 보성출신의 이학래 동진회(同進會) 회장 등 4명으로 알려졌다.

■  'B·C급 전범'  광주전남 출신 현황

이름

당시본적

형량

강대술

장성

6년6개월

김기동

장성

9년6개월

김대봉

목포

2년8개월

김두삼

광산

3년8개월

김봉진

강진

5년(중노동)

김용판

광산

10년

김장록

무안

사형(교수형)

노재영

광산

9년6개월

문제행

화순

7년6개월

문태복

구례

10년

박금영

광주

15년

박창호

광양

11년

배정만

광주

금고 6년

신주진

영암

2년

양월성

담양

13년4개월

오선택

화순

금고10년

유하연

영암

4년8개월

윤동현

강진

19년4개월

이영환

진도

2년8개월

이의도

신안

4년8개월

이학래

보성

20년

정규문

무안

금고5년

최계호

영광

10년

최명성

나주

21년

최성교

나주

6년

최영모

광산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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