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당시 전남도 부지사 정시채씨
80년 당시 전남도 부지사 정시채씨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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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집단발포 명령 모르는 일"/ 어떤 공무원도 시민을 폭도라 하지 않았다./ 수습위원 선정 '계엄군 공작' 말도 안돼/ '시민에 부하뇌동'이유 보완대 조사받기도// "노도라고 하는 것, 성난파도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80년 5월항쟁 당시 전남도 부지사였던 정시채 초당대 총장은 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가 있기전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저지선을 뚫고 도청을 향해 달려오던 시민들의 모습을 이같이 기억했다. 지난 17일 오후 광주항쟁 21주기를 앞두고 당시 장형태지사가 항쟁초기 모친상을 당해 도청을 비운 것과 달리 항쟁기간 내내 도청을 지키며 때론 계엄군과 때론 시민군과 동고동락했던 정총장을 통해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광주의 진실을 규명할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인터뷰했다. 예컨대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림과 동시에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이뤄진 사실에 대해 당시 도청의 최고책임자로서 어떤 행태로든 알고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 그러나 정총장은 "금시초문이다. 이미 그 전에 발포가 이뤄졌는데 집단발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당시 도청에는 대부분 직원들이 있었는데 설사 애국가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발포명령과 연관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또한 22일 계엄군이 물러난 뒤 정총장이 당시 수습위원을 주도적으로 모은 것과 관련,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자는 취지에서 원로들을 중심으로 구성했고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다"며 일각에서 일부 수습위원 선정과정에 계엄군의 공작이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특히 정총장은 28일 합동조사단이 내려와 조사를 벌인 직후 자신이 도청 공무원중에 유일하게 시민들과 함께 부화뇌동했다는 이유로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가 5일동안 구금돼 조사를 받은 사실을 털어놨다. 당시 보안대에서 정총장은 왜 도민장을 한다고 했는지, 직원들을 날마다 출근시키지 않은 이유, 특히 왜 한차례도 계엄군과 연락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집중추궁을 받았지만 공무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이 소명돼 그냥 풀려나왔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들중에 시민들을 폭도라고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정총장은 당시 시민들에게 쌀을 퍼다주기도 했고 어떻게 하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총기회수 등을 독려했다는 것. 그는 "80년 당시 도청에 내내 있었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도 이후 인생은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그후 정치행보도 모두 '숙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도청 최고책임자조차도 모르게 울려퍼진 애국가가 집단발포명령이 됐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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