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대지를 향해 열린 피의 길
오월, 대지를 향해 열린 피의 길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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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대지를 향해 열린 피의 길


죽은 자들은 오월 햇살 아래에서 고요하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흰 뼈에 서로 기대어
지하의 궁전에서 고요하다
죽음은 그들에게 이제
완결된 신성한 사건이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우리의 문제이다
시끄러운 세월 속에서 그 죽음은
아직도 허공에 둥둥 떠있으므로
어떤 의미 안에서도 완결되지 않은 채
허공의 시간을 향해 두 손을 뻗는
우리의 손끝에서 아직

무섭게 텅텅 울리므로
나는 피흘리는 네 곁에 있지 않았다
나는 얻어맞는 네 곁에 있지 않았다
나는 질질 끌려가 개처럼 얻어맞고
사지가 뭉개진 네 곁에 있지 않았다

대지에 흘러내린 네 피가 입을 열어
하늘을 향해 아벨의 비명을 질렀어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20여년이 지난 아름다운 오월
명치끝에 돌처럼 딱딱한 다른 심장 하나 얹혀 있다
내가 모른체했던 네 찢긴 살로부터 빠져나와
내 육체 안에 단단히 자리잡은 엉긴 심장

어쩔 것인가 나는 돌아온다
네가 얻어맞아 죽은 그 자리로
이미 너는 흰 뼈로 고요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역사의 이삭이라도 주워야 한다
한 알갱이라도 진정으로 단 할 알갱이라도

그것을 이윽고 대지에 내려놓아 싹을 틔우는 날
네 엉긴 심장이 나를 고요히 풀어주리라는 것
나는 안다 죽어서 고요한 자들
죽어서 역사의 이삭이 된 자들

오월 나의 또 하나의 심장
대지를 향해 열린
내 육체의 다른 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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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운동을 펴고 있는 원주 상지대 인문사회학부 김정란 교수가 5.18 21주기를 맞아 '시민의 소리'에 추모시를 보내왔습니다.

김정란 시인 프로필
1953년 서울 출생
聖心여자중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III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전공: 프랑스 현대시
(상상력 연구와 신화비평/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


시인, 문학평론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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