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얼굴과 가면 사이에서
뻔뻔한 얼굴과 가면 사이에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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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박몽구(시인.문학평론가)
노무현 정권의 임기가 불과 1년여 남겨두면서, 도하 신문지상에 차기 정권을 둘러싼 논의가 바야흐로 독자들로 하여금 무협지를 능가하는 흥밋거리가 되고 있다.

정책적 판단보다 대권 후보 동향 중심의 보도에 식상한 지 오래지만, 필자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권력 누수에 따라 개혁 세력의 사분오열 양상이 연일 도마에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른바 개혁 세력들이 정치적 격변기를 앞에 두고 드러내는 분열상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순전히 개인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의 논리가 급조되는 걸 보면, 과연 그들이 한 표에 담긴 민중의 피어린 삶과 기대를 얼마나 헤아리고 있는지 깊은 회의가 든다.

특히 정무직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건전한 비판을 넘어선 이전투구식 대립은 아직 진정한 개혁으로 가는 길이 멀구나 하는 절망감마저 안겨준다. 문민정부 이래 이 나라의 권력은 거대한 민중과 그를 등에 업은 민주 인사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그런데도 몇몇 인사들이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 꿰어찬 것처럼 오불관언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작태이다. 작금의 부동산 정책을 둘러싸고,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정책 입안자들이 광풍으로까지 불리는 서울 강남에 살면서 명쾌한 해결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 건 지극히 상징적이다. 제 앞에 먼저 단감을 놓고서야 어떻게 투명한 정책이 나오겠는가.

그런 점에서 지식인으로서, 의사로서 아프리카 해방전사로 복무하다 민초들과 똑같은 의료 현실을 감수하다 백혈병으로 절명한 프란츠 파농(1925-1961)의 삶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새삼 우리들을 감동시킨다.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제도에서 세관 검사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주민으로서는 드물게 프랑스 유학까지 가 의사 면허를 거머쥔다.

이른바 출세가 보장된 식민지 엘리트였다. 그런데 1950년대 알제리의 한 정신병원 원장으로 일하던 그는 유럽인에 적용되는 치료법을 흑인 원주민에게는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흑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원주민과의 정신적 차별과 넘어설 수 없는 벽 때문에 발병한 것이어서 유럽인의 그것과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종주국의 손발이 되어서는 결코 식민지 동포들의 병을 치유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모든 지위를 벗어던진 채 알제리 해방운동에 몸을 던진다. 백혈병에 시달리면서도 뉴욕이나 파리 등 의술이 뛰어난 도시로 가라는 권유를 뿌리친 채, 아프리카 민중과 똑같은 조건에서 투병하며 때로는 전사로, 때로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대사로 동분서주한 끝에 그는 루뭄바의 정신적 스승이 되어 가나를 해방시키는 데 일익을 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알제리 해방 1년 전인 1961년 민중들과 똑같은 치료를 받다가 끝내 세상을 등진 파농의 생애는, 모름지기 개혁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 준다.

모름지기 진정한 개혁에 몸을 담는 사람들은 지위에 연연해서는 안되며, 지위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은폐된 권력과 차별에 시달리는 민중을 위해서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참여 정권의 짧은 수명과 함께 분열이 노골화-만연화되고 있는 개혁 세력들은 모름지기 자기를 던지는 정신으로 임할 때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파농은 흑인인 자신은 검은 피부를 갖고 있지만, 혀끝마다 이성과 진리를 떠올리는 백인들을 가리켜서는 ‘흰 가면’을 가졌다고 공박했다. 민중들의 피어린 여망을 자신을 위한 자리, 치부의 꿈과 맞바꾸는 정치 지도자들 역시 가면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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