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현실과 우사 김규식
겨레의 현실과 우사 김규식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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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정규철(국제투명성기구 광주전남본부 공동대표)
“모든 미래의 역사가는 옛 질문에 새 대답을 주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질문자체를 개정해가야 한다.” 역사가 콜링우드의 말이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사의 변화가 참으로 무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그 생김새만큼이나 생각과 행동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요사이 상하를 막론하고 하는 짓들은 지식이나 경험과는 무관하게 저급하기 짝이 없다.

거짓된 논리와 왜곡된 시국관들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면서 우리 모두를 괴롭히고 있어도 이를 제어할 비책을 구하려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길을 잘도 간다. 그래서 그런지 만나는 분마다 나라 걱정, 겨레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털어놓기 일쑤다.

이런 때 나는 역사에 묻는다.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우사 김규식 선생은 1945년 여름 일본이 패망한 직 후 'The Lure of the Yangtze, 揚子幽景'이라는 긴 영문시를 남겼다. 32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이국전선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전승을 맞이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쓴 작품이다.

한 평생 나라 위해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광복’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사선생은 시를 쓰면서 한권의 책으로 묶어낼 계획을 세웠던 것인지 책머리에 들어갈 헌사(獻詞)를 미리 작성해 두었다.

‘이 땅위의 자유, 정의, 평화를 위해 싸우다 이름없이, 찬가없이 사라진 중국 한국 그 밖의 용사들에게 바친다’라고. 독립투사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기 전,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먼저 가신 님들과 한국독립운동을 비호하고 지지하여 준 중국에 대한 감사의 예(禮)를 겸손한 송가로 바치고자 한 것이다. 천도가 무엇인가를 알 것도 같다.

[양자유경]은 우여곡절 끝에 우사연구회가 1992년 국역하여 원문과 함께 간행하였는데 실로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이 작품은 ‘광막하고 깊디 깊으며 의미장중하여 언제나 사람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양쯔강’을 배경으로 중국의 문명과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자연은 문화의 모체이며 창조의 원천이기도 하다.

필자는 상해에서 들어가 한구, 무창, 의창, 중경, 가정, 아미산을 오르내리면서 그 때마다 음절형식으로 써내려갔다. 우창을 지나면서 쓴 “이곳은 사람들이 대량으로 마약을 거래하던 시장이었다/여기서 다시 먼 곳에 운반되어/뭇사람들이 거부가 되었고, 잘사는 지주와 토호들은/부정 축재한 가산을 모두 잃고/자신들도 시궁창에 빠져버렸다.”라는 대목에서 역사적인 감각과 문명비판적인 혜안을 읽는다.

우사선생은 대포와 군함을 앞세운 열강세력이 동아시아를 노략질하던 1881년 동래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고아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고,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주 Roanoke대학을 거쳐 Princeton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하였다. 20대 중반의 일이다. 황제의 밀사로 포오츠머스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 때 배재전문(연희전신)에서 영문학, 수사학, 한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세익스피어’에 정통했다고 한다.

우사의 정치활동은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나가면서 본격화되었다. 그가 제출한 20개항의 독립청원서에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국가라는 점과 倭帝의 야만적인 불법침략과 학살만행을 담았으며, 정곡을 찔렀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목적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해방정국에서 ‘고결한 이상주의자’로 알려진 선생은 1948년 남북협상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던 남측의 제의와는 달리 북측이 다분히 ‘공산정권수립의 정통성 확보‘차원에서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서도 38선을 넘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완고한 자주사상을 읽을 수 있다.

1948년 4월 3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식에서 “중일전쟁에서 우리는 얼마나 협력하였는가, 그 후에 온 것이 독립이냐 하면 오로지 단정(單政)뿐이었다. 그들이 (미국을 비롯한 나라들) 언제 우리의 독립을 바라고 원조하였는가!”라고 외쳤다.

/jkc81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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