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논문이나 평론을 퍽퍽하기 그지없는 ‘마른 건빵’처럼 여기기에, 그런 글은 쓰고 싶어 하지도 않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나아가선 ‘잘못된 글’이라고까지 비난한다. 그러나 그런 글들이 지식세계에 위세를 부리며 널리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메마른 사막을 허우적대며 헤매고 살아가고 있다. 근대문명의 어둠이 짓누르는 억압과 폭행의 하나이다. 난 그 메마른 사막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내 영화이야기도 그런 몸부림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내 영화이야기가 영화평론이 아닌 건 너무나 당연하다. 영화를 소재로 삼아, 내가 세상을 살아가며 느낀 생각들을 이렇게 저렇게 펼쳐보는 세상이야기이다. 그래서 내 영화이야기의 코너이름이 ‘영화로 보는 세상’이다. 때론 잡담처럼 때론 진지하게 때론 얄궂게 때론 매섭게 때론 산책하듯 때론 꼬장꼬장 때론 은근슬쩍 때론 강렬하게 ... . 영화마다 그 어떤 포인트를 잡아 글의 분위기를 잡아간다.
이런 사랑이야기에 전지현만큼 어울리는 여배우는 없을 것 같다. 심은하를 떠올려 그려넣어 보았지만 심은하의 얼굴은 덜 소박하고 이 영화의 분위기를 자기 페이스로 끌어당기지 못할 듯 하다. 전지현, [엽기적인 그녀]에 혀를 차며 헛웃음치고 말았지만, 그녀의 매력을 비웃진 않았다. 그녀의 매혹 포인트는 매우 다면적이면서도 그 전체적 이미지가 은은하게 고아해서, 그녀를 함부로 노리개 삼아 말반찬에 올리길 싫어했다. 그 은은한 매력을 아무도 모르게 깊이 숨겨두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상업적으로 떠오르는 게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낭비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했다. 이 영화는 그런 안타까움을 비로소 씻어주었다. 그녀의 매력을 제대로 잘 살려낸 것 같아서, 그녀에게 흐뭇하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괜한 욕심까지 부렸다. “그래! 넌 항상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있어주어야 해!” 장예모감독의 [연인]을 ‘장쯔이를 위한 장쯔이에 의한 장쯔이의 영화’라고 하였고, [댄서의 순정]을 ‘문근영을 위한 문근영에 의한 문근영의 영화’라고 했듯이, [데이지]는 ‘전지현을 위한 전지현에 의한 전지현의 영화’이다.
이 영화포스터가 전지현 정우성 이성재로만 그려져있길레 우리 영화려니 했다가, 유위강 감독의 작품이란 걸 보고 의아했다. 유위강? [무간도]의 유위강? 뭐야? 스텝진을 살펴보았다. 음악감독이 일본인이었다. 그렇든 저렇든 내가 지금까지 만난 홍콩 느와르 영화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무간도]. 스토리 전개가 숨쉴 틈 없이 긴박했고, 액션이 실감나도록 리얼했으며, 화면감각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선명했다. 그 영화의 유위강 감독이 평범치 않은 우리 배우들 셋을 픽업하여 그 이미지를 어떻게 살려내어 요리해낼까 자못 궁금했다. [무간도]는 단단하고 매운 맛인데, 이 영화는 정갈하게 산뜻하면서도 따사로운 봄볕같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와 [귀를 기울이면]에서 감흥했던 미감을 실사화면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섬모처럼 섬세한 그의 센서와 감성에 난 흠뻑 적셔들었다. 촬영앵글도 그 스토리가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다양하게 각도와 폭을 잡아내었다. 음악도 그 장면들에 그대로 함께 녹아들어 화면의 색감과 질감을 더욱 생생하게 살려내었다. 이 영화의 그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우성이 전지현에게 어떤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이 장면! 이 장면이 하도 좋아서,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아도 또 보고 싶어요.” 나도 이 영화가 그렇다. 특히 전지현이 데이지꽃을 기다리며 설레는 장면 · 자기 집에서 이성재를 맞이하며 화분을 받아드는 장면 · 따사로운 햇볕아래 광장에서 그림 그려주는 장면 · 이성재가 전지현에게 사과하는 장면들은 더욱 그렇다. 새기고 새겨서 깊이 담아두고 싶다. 백번을 다시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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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이 영화를 굳이 꼬집자면 두어 가지가 없지 않으나, 이 영화의 영상이 주는 잔잔한 감흥이 워낙 깊어서 그
감흥을 조금이라도 깨고 싶지 않다. 유위강감독의 또 다른 영화가 정말 기대된다. 그의 또 다른 변신도 보고싶다. 이런 감흥은 결코 흔치 않다.
꼭 보시라. 이왕이면 연인과 함께 살포시 손잡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