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기자의영화읽기]〈브로크백 마운틴〉
영화의 두 주인공 에니스와 잭은 스무살이 되던 해에 로키산맥의 한 자락인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떼를 방목하는 일에 고용된다. 광활한 대자연과 양떼들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어떤 격정에 휩싸여 '사랑'을 나누게 된다.그 사랑의 의미를 규정하지도, 계산하지도 못한 채 각자의 길을 떠나 가정을 이룬 뒤 둘은 4년만에 다시 만난다. 이후 20년 동안 지속된 그 만남은 '간통'보다도 더 위험해서 '비밀'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어서, 비밀의 부분적은 노출로 인해 그들의 '사랑'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동시에 황폐해진다.
유목과 정주, 자유와 의무, 자연과 문명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표시되는 '1963년'이라는 글자 또한 매우 의미심장한 '미국'이다. 그 해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 시위를 이끌며 'I have a dream…'을 외쳤고, 같은 해 11월 케네디는 달라스에서 저격당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1980년'과 같이, 그 자체가 강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연대기가 '1963년'인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대략 소설로 치환해보면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에니스와 잭이 양떼를 방목하러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산자락에 들어갔는데 그 때가 1963년이었다…" 정도가 될 터인데 이 묘사 속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극히 실존적인 차원에서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 위에 유년과 성년의 가치가 뒤얽힌 미국의 시대분위기를 '1963년'이라는 짧은 문구를 통해 포개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위험했을지라도 드넓은 자연과 더불어 해방감을 만끽했던 미국이 이제는 컨테이너 박스나 다름없는 삭막한 '집'에서 TV채널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풍요와 정주의 아이러니를 묘사하고 있는 모양새다.
최근 선보인 〈브로큰 플라워〉(짐 자무쉬, 2005), 〈돈 컴 노킹〉(빔 벤더스, 2006), 그리고 〈브로크백 마운틴〉(리안, 2006) 등 세 영화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배급업자들이 한글 제목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개인의 실존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을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 마지막 하나이다.
▲ 브로크 백 마운틴 | ||
이 여행은 모두 과거로의 여행이다. 곧 성찰의 시간이다. 이들이 성찰한 미국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그 황량함은 과거와 대면하면서 더욱 증폭된다. 막대한 물질적 부를 일구고, 초강대국의 위상까지 얻었으면서 미국은 여전히 헤매고 있다. 여자들은 이 남자들을 받아 주지도 않는다.
미국, 그들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We are free at least'… 1963년 워싱턴에서 마틴 루터 킹이 외쳤던 것처럼 그들이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와 장소는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미국의 뒤꽁무니를 맹렬하게 쫒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
저작권자 © 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