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안식처는 어디에
그들의 안식처는 어디에
  • 이정우 기자
  • 승인 2006.03.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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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기자의영화읽기]〈브로크백 마운틴〉
영화의 두 주인공 에니스와 잭은 스무살이 되던 해에 로키산맥의 한 자락인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떼를 방목하는 일에 고용된다. 광활한 대자연과 양떼들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어떤 격정에 휩싸여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 사랑의 의미를 규정하지도, 계산하지도 못한 채 각자의 길을 떠나 가정을 이룬 뒤 둘은 4년만에 다시 만난다. 이후 20년 동안 지속된 그 만남은 '간통'보다도 더 위험해서 '비밀'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어서, 비밀의 부분적은 노출로 인해 그들의 '사랑'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동시에 황폐해진다.

유목과 정주, 자유와 의무, 자연과 문명

▲ 브로크 백 마운틴 복잡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영화는 명확히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진행된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지속되는 공간은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유목의 터전이고, 그 사랑이 단절되어 고통 받는 장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도시의 정주공간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자유=자연을 상징한다면, 도시의 집은 의무=문명의 은유장치라 할 수 있겠다. 주목할만한 점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원초적 풍경을 잃지 않지만, 문명의 거처인 집안의 소품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계속해서 바뀐다는 사실이다.(특히 TV를 눈여겨보라.) 이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유목과 정주의 가치를 고루 살피는 듯하지만,궁극에는'유목=자연=자유'를 지지하는 감독의 태도로 읽힌다. 무엇이 영원하냐, 는 질문에 감독은 "대자연에서 자유롭게 양떼들과 뒹구는 유목의 삶"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할 경우 영화는, 그리고 감독의 철학은 평범함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을 수 있다. 몽골 초원에서의 삶을 찬양하면서도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선탠크림, 모자, 선그래스 등 온갖 문명의 발명품으로 자연의 위험을 대비하는 패키지여행객의 이율배반에 그칠 수도 있었던 셈이다. 다행히(!) 감독은 이야기를 더 깊이 진행시킨다. 자연과 인간, 남성과 여성이 구분되지 않는 유목적 삶은 자유롭지만 춥고, 배고프고, 위험하다. 그래서 항상 비극을 동반한다. 그 비극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 자유는 얻을 수 없다고 감독은 말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에니스는 비극을 회피하려 했고, 잭은 그것을 수용하려 했다. 둘은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한쪽의 상황은 다른 쪽으로 급속히 전이된다. 그 둘이 자유를 얻었는가에 대해서 감독은 결론을 유보한다. 미국인들의 근원적인 꿈에 대한 성찰 ▲ 브로크 백 마운틴
카우보이 모자, 청바지, 텍사스, 로데오, 개신교, 독립기념일…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관객들에게 비춰지는, 개척시대의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다. 그러나 이 아이콘들은 모두 자본에 포섭되어 있다. 에니스와 잭의 유목은 고용된 유목이고, 로데오는 상금이 걸려있는 경기장의 로데오일 뿐이며, 에니스의 아내는 자본주의의 첨단에 다름 아닌 대형마트 사장과 재혼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표시되는 '1963년'이라는 글자 또한 매우 의미심장한 '미국'이다. 그 해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 시위를 이끌며 'I have a dream…'을 외쳤고, 같은 해 11월 케네디는 달라스에서 저격당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1980년'과 같이, 그 자체가 강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연대기가 '1963년'인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대략 소설로 치환해보면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에니스와 잭이 양떼를 방목하러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산자락에 들어갔는데 그 때가 1963년이었다…" 정도가 될 터인데 이 묘사 속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극히 실존적인 차원에서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 위에 유년과 성년의 가치가 뒤얽힌 미국의 시대분위기를 '1963년'이라는 짧은 문구를 통해 포개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위험했을지라도 드넓은 자연과 더불어 해방감을 만끽했던 미국이 이제는 컨테이너 박스나 다름없는 삭막한 '집'에서 TV채널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풍요와 정주의 아이러니를 묘사하고 있는 모양새다.

최근 선보인 〈브로큰 플라워〉(짐 자무쉬, 2005), 〈돈 컴 노킹〉(빔 벤더스, 2006), 그리고 〈브로크백 마운틴〉(리안, 2006) 등 세 영화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배급업자들이 한글 제목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개인의 실존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을 성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 마지막 하나이다.

   
▲ 브로크 백 마운틴
앞의 두 영화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옛 애인이 낳아 버린 아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그리고 있고, 〈브로크백 마운틴〉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의 동성이 '사랑'의 장소를 찾아 역시 여행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여행은 모두 과거로의 여행이다. 곧 성찰의 시간이다. 이들이 성찰한 미국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그 황량함은 과거와 대면하면서 더욱 증폭된다. 막대한 물질적 부를 일구고, 초강대국의 위상까지 얻었으면서 미국은 여전히 헤매고 있다. 여자들은 이 남자들을 받아 주지도 않는다.

미국, 그들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We are free at least'… 1963년 워싱턴에서 마틴 루터 킹이 외쳤던 것처럼 그들이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와 장소는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미국의 뒤꽁무니를 맹렬하게 쫒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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