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의 은자(隱者)
뒷골목의 은자(隱者)
  • 정지아
  • 승인 2006.03.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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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정지아 소설가
박정희 정권 시절, 간첩으로 몰린 후배의 프랑스 망명을 도와주었다가 역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삼십 년 넘게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진이라는 사람이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소르본느 대학에 유학했던 그는 간첩으로 몰리기 전, 서울 유수 대학의 교수로 와달라는 청을 받은 적이 있다. 잠시 고민한 끝에 그는 정중히 청을 물리쳤다. 독재정권의 비위를 맞출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수직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남았던 이유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간첩으로 몰렸고, 60년대에 프랑스 유학을 하고 소르본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요즘 한 마디로 백수이다. 프랑스 사회에라도 적응했으면 좋으련만 쓴 소리 아끼지 않고, 잘못된 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성품은 문화 선진국 프랑스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유학을 끝내고 서울 모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던 이유진의 친구는 부임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안기부로 끌려갔다. 자유로운 프랑스 생활이 몸에 배어 거침없이 독재 정권을 비판한 결과였다. 해임되고 다른 학교에도 취직할 길이 망연해진 그 친구는 동대문 어느 털실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털 뭉치를 손에 감은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 친구는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의를 선택했던 자들의 행로가 이러하다. 이유진을 프랑스에서 만난 후로, 그의 쓸쓸한 말년이 어찌나 마음에 걸렸던지 산다는 일의 냉혹함에 오래도록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지위가 어찌되었든 이유진은 아름다웠다. 마흔 넘어 시작한 그의 중국어 공부는 고대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번역할 수준에 이르렀다. 번듯한 명함 없는 그의 말년을 우려하고, 그의 재능을 아끼는 여러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번역이나 집필을 의뢰했건만 그의 대답은 한결같이 ‘농(아니)’이다. 그럴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의 인정을 받은 여러 중국어 번역물의 오류를 짚어낼 수준이면서도 말이다.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 누가 하라는 일도 없는 백수의 몸이지만 이유진은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맹자는 ‘진심편(盡心篇)에서 “뜻을 이루지 못할 때는 자신의 몸가짐만 바르게 하고, 뜻을 이루었을 때는 온 천하를 바르게” 하라고 일렀다. 이것이 오랫동안 중국의 사대부 지식인을 지배해온 좌우명이었다. 40년 가까운 엄혹한 독재의 시기를 거쳐 왔지만 우리 사회에도 분명 그런 은자(隱者)들이 있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맑은 은자들은 세류의 혼탁함에 가려 잘 보이지 않고, 타락한 세류에 발 빠르게 적응해온 속물들만이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친일의 행적을 가리고 독재정권과의 결탁이나 변절을 소가 하품할 수준의 변명으로 가리려는, 이른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행적을 보고 있자면, 사는 데는 다른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 ‘의리’ 하나면 충분하다던 한 장사꾼의 말이 떠오른다.

장자는 초의 위왕이 재상으로 초빙했지만, 살을 찌워서 제사 때 산 제물로 바치는 소가 되기보다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자유롭게 노는 편이 낫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짚신을 삼아 근근이 생계를 꾸리며 뒷골목의 은자로 평생을 보냈다. 인맥을 위해 초등학교부터 명문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전 국민이 출세와 돈을 향해 치달리는 요즘, 나는 뒷골목의 은자들이 그립다.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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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섭 2006-03-12 20:38:56
우리 주위에도 이런 좋은 글을 쓰신 분이 계신다는 사실에 좀 위안을 받습니다. 앞으로도 심금을 울리고 때리는 좋은 글 계속....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