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 장갑수
  • 승인 2005.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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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태극종주 연재1]
*이번 산행기는 2박3일간의 지리산 태극종주입니다. 태극종주 코스는(경남 산청 웅석봉- 전북 남원 덕두봉)지리산 최장종주코스로 지리산 능선의 '처음과 끝'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문 산악인들이 즐겨찾고 있습니다. 거리는 성삼재- 천왕봉 코스보다 3배 이상으로 지도상 73킬로미터(실제거리 80.7킬로미터)입니다. 지난달 14일부터 16일까지 2박3일간 다녀온 산행을 2회에 걸쳐 연재 합니다. /편집자 주 ▲ 제석봉 고사목과 주능선 ⓒ장갑수
경호강의 유유한 물줄기를 따라 산청으로 달려간다. 웅석봉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거쳐 덕두산까지 태극문양을 그리며 뻗어가는 지리산의 시작과 끝을 잇는 태극종주의 대장정에 나서는 길이다. 14시간 이상을 걸어야하는 첫날 산행을 위해서는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해야하는 터라 웅석봉 아래 어천마을에 민박을 든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발준비를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계속된 장맛비에 어천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다. 점차 물소리는 멀어지고 길은 능선으로 달라붙는다. 계곡 길을 벗어나고 보니 태극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이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운무 덮인 경호강이 신비롭고, 운해위로 고개를 내민 둔철산은 섬이 된다. 새와 매미의 아침연주가 이미 시작되어 온 산에서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남동쪽으로 바라보이는 달뜨기능선에도 운무가 가볍게 덮여 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저 달뜨기능선으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생각하고,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했다고 한다.

▲ 말나리 ⓒ장갑수 웅석봉(1,099m)에 올라서자 곰 모양을 새겨놓은 검은 색 표지석이 반갑게 맞이한다. 경호강과 둔철산이 웅석봉을 호위하고, 가파른 경사를 이룬 북서쪽 비탈이 아찔하다. 정상에서 놀던 곰이 가파른 북사면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는 웅석봉(熊石峰)의 이름이 실감난다. 능선 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는 지곡사를 품고 있는 곰골에 운해가 떠 있고, 왼쪽으로는 멀리 지리산 지능선들이 길게 이어진다. 녹색의 수해(樹海)와 흰색의 운해(雲海)가 대비를 이룬 모습은 지리산의 아침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풍경이다. 하봉에서 본 초암능선의 신비경 산청읍에서 대원사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인 밤머리재(570m)에서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 기분으로 왕등재로 향한다. 나무 사이를 뚫고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준다. 앞으로 바라보이는 왕등능선이 움직이는 운무에 춤을 춘다. 동왕등재(935.8m)에 올라서자 비로소 지리산의 품속에 깊이 빠져든 것 같다. 서왕등재를 거쳐 하봉-중봉-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동부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이고, 웅석봉과 지금까지 지나온 능선이 첩첩이 다가온다. 유장한 산줄기는 대원사계곡 같은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내었다. 깊고 깊은 골짜기 상류에 윗새재마을이 별천지처럼 자리 잡고, 중류부에는 대원사가 고즈넉하게 앉아 수도 정진중이다. 서왕등재에서 10분 정도 내려오니 3만㎡에 이르는 넓은 습지가 펼쳐진다. 습지는 푸른 초원을 이루고 꽃창포가 군데군데 피어 있다. 그 위를 나는 잠자리 떼가 마냥 자유롭다. 습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습지를 빠져나가면서 개천을 이룬다. 새재에 도착하니 윗새재마을이 가깝다. 30분 정도면 내려갈 수 있어 3박4일 일정으로 태극종주를 하는 경우 윗새재마을을 숙소로 이용할 수 있다. 노랑 원추리와 보라색 꽃창포 너머로 하봉이 바라보인다. ▲ 비비추 ⓒ장갑수
숲 속에 푹 빠져 걷다가 전망이 트이는 바위에 서면 북쪽으로 엄천강의 유유한 물 흐름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독바위를 지나자 조갯골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외로움을 달래준다.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줄기까지 물소리가 크게 들려오다니, 지리산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조갯골 물소리는 우리를 쑥밭재로 인도한다. 쑥밭재에서 2~3분만 내려가면 조갯골 물이 철철 흘러내린다. 울창한 숲과 자욱한 안개가 숭엄한 느낌을 전해준다. 지리산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곳이라 등산객 한 사람 만날 수가 없다.

계속되는 오르막이 숨을 헉헉거리게 하고, 쑥밭재 근처에서 들려왔던 물소리마저도 끊어져 적막하기까지 하다. 가끔 울어주는 새소리가 적막한 산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의 외로움을 달래줄 뿐이다.

낯익은 국골사거리 이정표를 만나자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다람쥐 한 마리가 인간의 탐욕을 버린 두 나그네들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 편견이 없어진 인간은 산속의 야생동물과 이렇게 친구가 된다. 지대가 높아짐에 따라 구상나무, 잣나무 같은 고산식물이 많아진다.

하봉(1,781m)에 올라서자 초암능선이 잠시 구름옷을 벗어준다. 하봉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국골과 칠선계곡을 가르면서 길게 이어지는 초암능선은 수직절리를 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 아기자기하다. 아름다운 바위들은 격조 높은 구상나무의 자태와 어울려 절경이 되었다. 여기에 다시 운무가 덮이니 이는 신비경이다.

수많은 봉우리 호령하는 천왕봉

   
▲ 범꼬리 너머 주능선 ⓒ장갑수

중봉(1,875m)에서 바라본 마야계곡의 운무와 암릉을 이룬 써리봉의 조화가 예술적이다. 웅장하게 솟아 있는 천왕봉이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호령하고 있는 듯하다. 천왕봉 너머로 꿈틀거리는 주능선이 유장하다. 웅대한 천왕봉도 불쑥 솟은 바위와 구상나무, 고사목이 어울려 아기자기하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급경사가 나를 힘들게 한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써리봉과 운무에 덮인 칠선계곡이 힘내라고 격려를 한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천왕봉(1,915m) 표지석이 나그네를 변함없이 맞이한다. 서쪽과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이어가는 주능선의 여러 봉우리들이 천왕봉을 향하여 합장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햇살에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실루엣을 이루며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아, 장엄함이여!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제석봉 고사목 너머로 비췬 낙조는 지리산의 감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준다. 지리산 줄기는 수십 번 겹쳐지면서 파도가 일렁이는 듯 꿈틀거리고, 운해 위에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붕긋 솟은 반야봉은 지리산의 포근함을 대변해준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국골을 거쳐 올라온 일행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을 지어먹고 야외탁자에 앉아 소주 한 잔씩을 나눈다. 하늘에서는 별빛이 속삭이듯 말을 걸어오고 두둥실 뜬 달이 밝은 미소를 보낸다. 장시간의 산행으로 피곤했던지 몇 순배 술잔이 돌자 스르르 눈이 감긴다.

/2부로 계속 이어집니다.

*산행코스
어천마을(2시간) → 웅석봉(1시간 40분) → 밤머리재(1시간 50분) → 동왕등재(1시간 50분) → 왕등재습지(50분) → 새재(2시간) → 쑥밭재(1시간 10분) → 국골사거리(50분) → 하봉(50분) → 중봉(40분) → 천왕봉(50분) → 장터목대피소(1시간 30분) → 세석대피소(1시간 30분) → 선비샘(50분) → 벽소령대피소(1시간 30분) → 연하천대피소(1시간 50분) → 화개재(1시간 30분) → 임걸령(1시간 20분) → 고노단대피소(40분) → 성삼재(2시간 30분) → 만복대(40분) → 정령치(30분) → 고리봉(1시간 30분) → 세걸산(1시간 30분) → 팔랑치(40분) → 바래봉(40분) → 덕두산(1시간 40분) → 인월 (총소요시간 : 34시간 50분)

*가는 길

-. 대진고속도로 산청나들목을 빠져나와 경호강변의 3번 국도를 따라 진주방향으로 달리다가 심거마을 입구에서 경호강 다리를 건너 1.4km쯤 가면 웅석봉 초입인 어천마을이다.
-. 하산지점인 인월은 88고속도로 지리산나들목에서 5분 정도만 달리면 곧바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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