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태극종주 연재1]
새벽 4시에 일어나 출발준비를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계속된 장맛비에 어천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다. 점차 물소리는 멀어지고 길은 능선으로 달라붙는다. 계곡 길을 벗어나고 보니 태극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이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운무 덮인 경호강이 신비롭고, 운해위로 고개를 내민 둔철산은 섬이 된다. 새와 매미의 아침연주가 이미 시작되어 온 산에서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남동쪽으로 바라보이는 달뜨기능선에도 운무가 가볍게 덮여 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저 달뜨기능선으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생각하고, 만나지 못하는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했다고 한다.
조갯골 물소리는 우리를 쑥밭재로 인도한다. 쑥밭재에서 2~3분만 내려가면 조갯골 물이 철철 흘러내린다. 울창한 숲과 자욱한 안개가 숭엄한 느낌을 전해준다. 지리산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곳이라 등산객 한 사람 만날 수가 없다.
계속되는 오르막이 숨을 헉헉거리게 하고, 쑥밭재 근처에서 들려왔던 물소리마저도 끊어져 적막하기까지 하다. 가끔 울어주는 새소리가 적막한 산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의 외로움을 달래줄 뿐이다.
낯익은 국골사거리 이정표를 만나자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다람쥐 한 마리가 인간의 탐욕을 버린 두 나그네들 앞에서 재롱을 부린다. 편견이 없어진 인간은 산속의 야생동물과 이렇게 친구가 된다. 지대가 높아짐에 따라 구상나무, 잣나무 같은 고산식물이 많아진다.
하봉(1,781m)에 올라서자 초암능선이 잠시 구름옷을 벗어준다. 하봉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국골과 칠선계곡을 가르면서 길게 이어지는 초암능선은 수직절리를 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 아기자기하다. 아름다운 바위들은 격조 높은 구상나무의 자태와 어울려 절경이 되었다. 여기에 다시 운무가 덮이니 이는 신비경이다.
수많은 봉우리 호령하는 천왕봉
▲ 범꼬리 너머 주능선 ⓒ장갑수 | ||
중봉(1,875m)에서 바라본 마야계곡의 운무와 암릉을 이룬 써리봉의 조화가 예술적이다. 웅장하게 솟아 있는 천왕봉이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호령하고 있는 듯하다. 천왕봉 너머로 꿈틀거리는 주능선이 유장하다. 웅대한 천왕봉도 불쑥 솟은 바위와 구상나무, 고사목이 어울려 아기자기하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급경사가 나를 힘들게 한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써리봉과 운무에 덮인 칠선계곡이 힘내라고 격려를 한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천왕봉(1,915m) 표지석이 나그네를 변함없이 맞이한다. 서쪽과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이어가는 주능선의 여러 봉우리들이 천왕봉을 향하여 합장을 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햇살에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실루엣을 이루며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아, 장엄함이여!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제석봉 고사목 너머로 비췬 낙조는 지리산의 감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준다. 지리산 줄기는 수십 번 겹쳐지면서 파도가 일렁이는 듯 꿈틀거리고, 운해 위에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붕긋 솟은 반야봉은 지리산의 포근함을 대변해준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국골을 거쳐 올라온 일행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을 지어먹고 야외탁자에 앉아 소주 한 잔씩을 나눈다. 하늘에서는 별빛이 속삭이듯 말을 걸어오고 두둥실 뜬 달이 밝은 미소를 보낸다. 장시간의 산행으로 피곤했던지 몇 순배 술잔이 돌자 스르르 눈이 감긴다.
/2부로 계속 이어집니다.
*산행코스 어천마을(2시간) → 웅석봉(1시간 40분) → 밤머리재(1시간 50분) → 동왕등재(1시간 50분) → 왕등재습지(50분) → 새재(2시간) → 쑥밭재(1시간 10분) → 국골사거리(50분) → 하봉(50분) → 중봉(40분) → 천왕봉(50분) → 장터목대피소(1시간 30분) → 세석대피소(1시간 30분) → 선비샘(50분) → 벽소령대피소(1시간 30분) → 연하천대피소(1시간 50분) → 화개재(1시간 30분) → 임걸령(1시간 20분) → 고노단대피소(40분) → 성삼재(2시간 30분) → 만복대(40분) → 정령치(30분) → 고리봉(1시간 30분) → 세걸산(1시간 30분) → 팔랑치(40분) → 바래봉(40분) → 덕두산(1시간 40분) → 인월 (총소요시간 : 34시간 50분) *가는 길 -. 대진고속도로 산청나들목을 빠져나와 경호강변의 3번 국도를 따라 진주방향으로 달리다가 심거마을 입구에서 경호강 다리를 건너 1.4km쯤 가면 웅석봉 초입인 어천마을이다. -. 하산지점인 인월은 88고속도로 지리산나들목에서 5분 정도만 달리면 곧바로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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