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일자 ‘전문가좌담’을 끝으로 마무리 지은 본보 기획물 ‘나무로 만들어 보는 아시아문화전당’의 논점과 주장에 대해 전남매일 박호재 편집국장이 의견을 보내왔다.
아시아문화전당을 나무로 만들어보자는 기획물의 제안을 두고 박 국장은 “목재라는 자재를 빌딩건축의 주재료로 사용해보자는 발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획기적 사고”라며 “그 발상에 동조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국장은 건축물의 주재료를 목재로 가져갈 경우 “많은 천정공간을
요구하는 목조 트러스가 필요할 게 당연하고, 고층구조에서 이것은 큰 핸디캡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목재가 모든 건축행위에 유리한 ‘전방위적
소재’라는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박 국장이 보내온 원고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인간이 영장류에 속하고 있음을 근거로, 인간의 초기 주거지가 나무 위 였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일부 문화인류학자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숲과 나무가 있는 전원적인 공간을 선호하는 현상 또한 나무위에 주거하던 영장류의 본성이 여전히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실제로 아콜로지(Arcology:생태건축)를 추구하는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 중에는 거대한 나무 위에 군집을 만드는 개념에서 출발하는 작업이 적지 않다.(사진-1 참조)
이렇듯 문화인류학적 패러다임을
통해 접근하든 혹은 생태건축가들의 작업 컨셉을 통해 들여다보던 간에 ‘나무로 만든 집’은 생태적 주거의 전형적인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근래에
전원주택의 한 유형으로 통나무집이 인기를 끌어 온 점, 또 최근에 와서 웰빙형 주택의 가장 유효한 재료로 목재가 연구되고 있다는 점도 그 같은
문화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1950년대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비엔나 시의 재건을 위해 이주해 온 노동자들의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대형 콘크리트 아파트를 짓고 그 이름을 ‘칼 마르크스 호프’ 라고 명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건축 재료 또한 일정 부분 사회적 산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이 되물음을 굳이 제시한 이유는 물론 목재가 건축을 구성하는 필요충분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부인하자는 게 아니라, 목재가 모든 건축행위에 유리한 ‘전방위적 소재’라는 도그마에 빠져서는 또한 안된다는 견해를 밝히기 위함에서다.
구조공학을 배운 엔지니어들은 잘 아는 얘기지만, 목재가 직강압력을 받는 압축력에는 대단히 강하지만 인장력(휨 응력)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가령 철구조물이나 철근 콘크리트 구조재가 갖는 인장 강도를 목조가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간이 요구되는 틀을 짜야한다. 고층건물의 경우 이 틀을 짜는 층간의 공간 문제 때문에라도 필요 이상의 높이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목조건축이 지닌 평화공동체적 상징성은 지난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뤽 로우(Rick Lowe, 미국)의 설치작품이 이미 훌륭하게 대변한 바가 있다. ‘프로젝트 로우 하우스’(사진-2 참조)라는 이름으로 ‘혼성전’에 설치된 이 작품에서 뤽 로우는 목재로 만든 미국의 전형적인 캐빈 내부에 빈민들을 위한 해비태트 프로젝트에 공동체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 공공미술의 전 과정을 기록한 사진을 부착, ‘혼성을 통한 아름다운 공동체 추구”라는 정치적 의제를 ‘나무로 만든 집’ 이라는 미학적 기호를 통해 도출시킨 것이다.
나무 집으로 대변되는 이 같은 인문적 상징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면 , 이제 남은 문제는 건축 자재로서의 목재, 이를테면 텍스처로서의 제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과제일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나무라는 텍스처 자체가 인문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 공감한다면, ‘디자인에 텍스처를 맞춰가는 방식’이 아닌 ‘텍스처가 디자인을 주도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목재의 아시아 전당 주재료 사용 논란이 단순히 ‘사용 가능성’ 여부에만 모아져서는 안될것이다. 공원형 시민광장-저층화-친환경 생태적 재료로서의 목재 등과 같은 복합적 가치 속에서 포럼이 형성됐을 때 실천적 대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박호재 전남매일 편집국장 hojae-park20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