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광주 남구청이 마련한 '제1회정율성 국제음악제'도 이러한 정 선생의 음악업적을 고향에서 이어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구청은 음악제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문화 동질성과 차이점을 이해하고 문화 교류의 촉진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고 또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하나되는 기회를 제공 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고 있다.
한편 10일 정 선생의 생가와 남구청을 찾은 쑨 부장은 국제음악제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적극 협조하기로 하는 등 우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역사와 기억에서 잊힐 뻔한 한 혁명음악가가 2005년에 고향에서 자신의 음악제로 부활을 앞두고
있다
정율성 약력
▮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과 중국행. ▮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 ▮ 항일비밀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 상해에서 러시아 저명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 사사. ▮ 1937년 10월 연안으로 옮겨 노신예술학교 입학. - 모든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팔로군행진곡], [연안송] 등 작곡 발표 - 힘차게 시작되는 [팔로군행진곡]은 큰 사랑 받으며 군가로
채택. 1988년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 군가]로
비준. -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인민해방군가] 연주 ▮ 1945년
해방 직 후 평양행. -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행진곡] 등
노래와 [동해어부], [두만강] 등
대합창곡 창작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으로 귀환 왕성한 창작 활동 ▮ 1966년 문화대혁명 시작으로 모든
창작의 권리를 빼앗긴 정율성! - 불타는 예술혼, 그러나 예술을 위해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은 태초의
혁명가 - 모진 시련 속에서 창작열을 내재한 채 혁명가로서의 길 고수 ▮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낚시 중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