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기자의 영화읽기]에로스
‘위험한 관계’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여자 주인공은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망사로 된 윗옷을 입으면서, 동시에 치마와 샌달은 불편하게 관리해야 하는 ‘끈’으로 되어 있다. 여자 주인공은 또한 진흙의 구질구질함에 역정을 내고 자신을 가볍게 대하는 남편에게 화를 낸다.
그녀의 몸과 옷, 행동은 문명과 야성, 현실과 판타지의 길항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발가벗은 채 해변에서 춤을 추다 역시 발가벗은 채 누워있는 여인(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한)을 그녀가 ‘발견/응시’하는 지점에서 끝을 낸다. 누워있는 그 여인은 우리의 여주인공 내면에 숨겨져 있었던 또 다른 자아라는 암시이다.
‘그녀의 손길’은 판타지가 아닌, 지독한 현실 속의 창녀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양장옷 재단사를 등장시켜 사랑의 의미를 탐색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길’ 또한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그의 이유가 ‘기억이라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초짜시절, 자신을 희롱했던 그녀의 손길이다. 판타지를 복원하려는 남녀주인공의 애절한 몸부림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현실과 판타지의 ‘시간차’를 극복하지 못한다.
감독들의 이전 작품과 연결되는 이야기
일견 난해해 보이는 영화들은 감독이 이전 작품들에서 꾸준히 말해왔던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새로울 게 없다는 이야기다.
새로움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는데 영화들의 막간에 화면을 떠다니는 그림, 그리고 주제곡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로렌조 마토디의 작품이라고 한다. 남녀가 서로 희롱하면서 노는 여러 컷의 그림들이 아름답다. 주제곡은 스페인 출신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서 ‘쿠쿠루쿠쿠 팔로마’를 불렀던 브라질 출신의 카에타노 벨로스의 목소리이다. 그림과 음악은 그 자체로서 ‘네번째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상적이다.
‘그녀의 손길’은 [아비정전] [화양연화] [동사서독] [2046] 등의 작품들에서 드러낸 왕가위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참담해지는가 하면, 시간에 아랑곳없이 더욱 강렬해지는 사랑의 난해한 속성을 지극히 폐쇄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그렇다.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로맨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만 배우만 교체됐다. 양조위(혹은 장국영) 대신 장첸, 장만옥 대신 공리로.
‘꿈속의 여인’은 스티븐 소더버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카프카] 의 문제의식에 닿아 있다. 자기고백, 엿보기, 몽상 따위의 테마들을 통해 덧없이 헤매고 있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대인들은 우선적으로 ‘미국인’이다. 자신들의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프로이트 밖에는 알지 못하는, 복잡한 듯 하면서도 매우 간단한 미국인의 삶을 말하는 영화이다.
‘위험한 관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영화는 [구름 저편에]와 [욕망] 두 편 밖에 보지 못했다. 주인공이 아닌, 감독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욕망]의 카메라워킹을 ‘위험한 관계’에서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위험한 관계’는 또한 [구름 저편에]가 여러 단편들을 통해 묘사한 열정과 소외의 사랑학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보지 못한 게으름 때문에 논의를 진척시키는 데는 자신이 없다. 다만 유럽의 영화들이 단골메뉴로 다루는 ‘문명/야성’ ‘인공/자연’ ‘일상의 권태/탈출의 욕망’ 등의 대립구도가 ‘위험한 관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점만 말하기로 하자.
아름답지만 신선하지는 않는…
“부엌에서는 여왕, 외출했을 때는 창녀, 잠자리에서는 식모…”
안정효가 [낭만파 남편의편지]에서 희화시켜 묘사한 ‘현실의 아내상’이다. [에로스]는 안정효의 진술처럼 주어진 현실과 바라는 현실, 즉 판타지 사이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영화들의 시선은 지극히 ‘남성적’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감독들이 남성으로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유지한 채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판타지는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데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비현실’이라는 것이 세 편의 작품이 내세우는 공통된 발언이다. 발언의 솔직담백함이 영화의 미덕인 반면에 발언의 방식은 이전 영화들의 도달치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에로스]는 의미 있게 만나볼만한, 그러나 신선하지는 않은, 조금 난해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10년 된 사랑, 혹은 10년 된 아내가 그렇듯이.
▲ 그녀의 손길 | ||
지켜보는 사랑 ‘그녀의 손길’ / 왕가위
“이 감촉을 기억해요. 그걸로 내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줘요.”
재단사인 장은 오래 전 그날 일을 잊지 못한다. 아직 견습생이던 시절, 고급 콜걸인 후아가 그녀에게 심부름을 간 자신의 다리를 쓰다듬던 그 순간을... 그 일 이후, 장은 후아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던 촉감을 간직한 채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 나간다. 그러나 후아의 전담 재단사일 뿐인 장은, 다른 남자들을 위해 그녀가 입을 옷을 정성스레 만들며 그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세월은 흘러, 후아는 파산과 함께 병든 모습으로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서글픈 신세가 되어있다. 변함없이 그녀를 지켜보던 장은 이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 하는데... 그녀와 사랑할 수 있을까?
환상 속의 사랑 ‘꿈속의 여인’ / 스티븐 소더버그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광고 회사에 다니면서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남자 닉 펜로즈는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꾼다. 왠지 낯익은 한 여자가 야릇한 몸짓을 한 채 그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꿈에선 분명 아는 사이인데, 깨고 나면 도통 누군지 알 수 없는 이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서 신경쇠약 직전에까지 이르게 된 닉. 결국 정신분석가를 찾아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게 되고, 담당 의사는 그를 눕힌 채 꿈 속의 장면을 하나씩 더듬어 가도록 하는데...
흔들리는 사랑 ‘위험한 관계’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당신도 그를 아나요...?”
권태기에 빠진 부부 크리스토퍼와 클로에는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이미 소원해진 두 사람은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광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말없이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런 끝에 심하게 싸움을 하고 헤어지는 두 사람. 혼자 남은 크리스토퍼는 식당에서 만난 신비스런 여인에 이끌려 그녀와 격정적인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인적 없는 해변가를 거닐던 클로에는 우연히 그녀와 마주치고, 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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