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름을 다 잊고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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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5.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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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정현애 전 광주시의원

   
▲ 정현애 전 광주시의원
삼가 민족의 큰 스승 윤영규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화창한 봄날  ‘윤영규선생님께서 돌아 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저는 망연자실하였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지역 사업’에 관해 제 남편과 전화로 상의하시는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문제로 찾아뵙고 상담할 일이 있었는데, 차라리 그때 전화를 바꾸어 인사말이라도 여쭙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아쉽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81년 어느 이른 봄날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5.18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시다가 구속되셨지요? 석방되시자마자 사모님과 함께 곧바로 녹두서점에 오셨습니다. ‘감옥에서 나가면 녹두서점에 들러 정현애부터 위로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남편은 20년형을 받고 아직 감옥에 있었고 서점운영도 너무 어려울 때인데, 여러 가지 위로 말씀도 해주시고 일부러 여러권의 책을 사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저를 위로하고 싶은 심정이셨을 것입니다. 아직 애가 없는 저희를 걱정하시면서 ‘상윤이가 석방되어 어서 아이부터 낳아야 한다’는 걱정도 해주셨습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저에게 항상 자상한 아버지이셨습니다. 제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선생님은 언제나 저의 길잡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찌 저에게만 자상한 아버지 같았겠습니까?  운동권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의 대부분의 후학들도 항상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감싸주신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어려운 역사적 결단을 하시는 순간에도 ‘이것이나마 내가 할 수 있다니 다행아닌갗 하시면서 후학들을 감싸시며 묵묵히 먼저 앞으로 가셨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어찌 일곱이나 되는 딸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평생 고생만 하시던 사모님이 왜 가슴앓이처럼 마음에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생님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겪어야 할 마음고생, 경제적인 어려움을 먼저 걱정하셨습니다.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을 결성할 무렵이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이 일로 많은 교사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마음에 걸리네“ 라고 한숨지으셨지요? 선생님께서는 5.18민중항쟁 이후에도 ‘교육 민주화 선언’ 사건으로 또 한번의 옥고를 치러 벌써 감옥생활만 세 번째였습니다.

전교조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후 선생님께서는 전국의 교육현장을 안방처럼 돌아다니시면서 해직교사나 현장교사들을 격려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현장을 다녀오신 후에는 “전교조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하시면서 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감격해하시고 그들의 어려움에 노심초사하셨습니다.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음으로 감옥생활을 하신 이후에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시겠다고 결심하셨다지요? 그러나 80년 당시, 넝마로 생계를 꾸리던 젊은이들에게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라면서 도청을 떠나라고 하자 “우리들도 애국한번 할랍니다. 우리 같은 놈들은 애국도 못합니까?”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당신께서도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셨다지요? 

“정말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애국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겠구나”하고 결심하셨다지요?  제가 어찌 선생님의 큰 뜻을 헤아리겠습니까마는, 제가 보기에 선생님께서는 이 역사적 사명감을 숙명처럼 안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던 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그 뜻을 펼치시면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운동, 교육운동, 노동운동, 평화통일운동 등 어느 부분에서나 선생님께서 민족의 큰 스승이 되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운동의 성과도 성과이지만 선생님의 발걸음이 많은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고 길이 되어 있습니다.

 내색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왜 가장으로써 그리고 일곱 공주의 아빠로써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겠습니까? 5번이나 투옥되시면서 결혼적령기를 넘긴 딸들이 줄줄이 있는데 아빠로서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겠지요. ‘어서어서 결혼을 시켜야 할텐데’ 때로는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겠지요.

선생님의 활동을 이해하고 때로는 앞장서서 돕던 사모님을 마음속으로만 염려하시는 심정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숙명처럼 습관처럼 자신의 삶을 좋은 나라와 사회를 만드는데 집중하셨습니다. 그러한 삶이 꼭 올바른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을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신 것을 보면서 두려운 존경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최근에도 지역의 통합, 통일문제를 걱정하시고 염려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한 한이 있으신지요? 이제 다 놓으시고 편안하게 가십시오, 남아 있는 저희들이 부족한대로 선생님의 뒤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모두가 애국하는 나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믿고 따르시던 하느님의 품에서 모든 시름을 다 잊으시고 부디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2005년 4월 4일
정현애 드림(전 전교조 광주지부 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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