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외로운 혁명전사 위로하는 굵은 빗줄기만"
[추모사]"외로운 혁명전사 위로하는 굵은 빗줄기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4.11.1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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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반미운동의 선봉장' 정순철을 보내면서
1980년 12월 9일 광주 미문화원 방화를 통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후세력으로 미국을 전세계에 알렸던 정순철씨가 지난7일 향년 49세에 사망했다. 고인은 1986년에는 인천5.3사건과 관련 수배생활을 했으며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했다. 지난 11일 고인은 100여명의 유가족, 선. 후배들의 애도속에 5.18 망월동 국립묘지묘역에 안장됐다. 고인과 함께 광주미문화원 방화투쟁을 주도했던 임종수씨의 추모글을 게재한다.

   
▲ 고 정순철 전 전청련 회원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찮더니 5.18국립묘지에 도착할 무렵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영령들을 참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오늘은 지인을 떠나보내는 영결식이어서 침통한 심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묘역입구에는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전청련)회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조문객들이 와있었다. 오랜만에 대하는 반가운 얼굴들이다. 영구차를 기다리는 동안 윤종형, 박시영과 함께 김동혁 선생 묘소를 참배하기로 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묘소로 가는 동안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김동혁 선생은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된 5명의 공범(?) 가운데 가장 먼저 작고하신 분이다. 평생을 교육사업과 농민운동에 헌신해오신 김 선생은 가톨릭농민회 전남지부장을 역임하였는데, 매우 강직하고 원칙에 투철하신 분이었다.

자택에서 경찰에 연행될 당시, 가족들에게 “내가 잡혀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이 더러운 세상을 반드시 뜯어고쳐라”고 당당하게 일갈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정중하게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묘역 입구로 되돌아오니 영구차가 당도했다. 묘역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 직원들이 익숙한 동작으로 관을 옮기고 정순철 선배의 유일한 혈육이 맨앞에서 영정을 들고 섰다. 정한빛마루. 올해 열한살이다. 이 어린 아들을 홀로 남기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가슴 한켠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운구행렬이 참배광장을 가로질러갔다. 마음을 헤집고 울려대는 노래소리와 함께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서러움을 더해주었다. 우람한 체구에 호탕하게 웃던 너털웃음, 육두문자를 거칠게 내뱉으며 단숨에 막걸리를 털어넣던 형의 소탈한 모습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 해 겨울,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계획된 우체국앞 가두시위가 무산된 직후 농성동 한전 부근 소주코너에서 마주 앉았을 때, 내가 미 국무장관의 방한소식과 이란 혁명 당시 미문화원 테러 사실을 이야기하자 솥뚜껑만한 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치며 “그래! 바로 이거야 광주미문화원 방화!”라고 나지막하면서도 힘차게 외치던 형. 진눈깨비 흩날리던 겨울밤, 오성여관 창문을 통해 광주미문화원 지붕위로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고 내가 건넨 기름통을 들이부으며 침착하게 불을 붙이던 형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추모탑 앞에 마련된 영결식장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추도행사를 마치고 장지로 운구한 후 신부님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파헤쳐진 흙구덩이를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금년 5.18행사에 참석했던 형을 생각했다.

이곳 묘역을 함께 참배하면서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이곳에 묻힐까?"라고 농담조로 말하자, “나는 몸이 튼튼해서 제3묘역이 생길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라며 껄껄 웃던 형.

보름 전 서울중앙병원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형은 주사바늘로 배에 가득찬 복수를 빼내는 순간에도 자신의 복부에 계란크기로 울퉁불퉁 솟아오른 암덩어리를 직접 만져보게 하면서 내 건강을 거듭 당부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싸늘한 시신으로 망월묘역에 묻히게 되다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관 위에 흙이 한삽 한삽 덮이면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위해 봉화를 높이 올렸던 형의 못다이룬 한과 아픔도 함께 묻혀갔다. 외롭고 고단했던 혁명전사의 죽음을 위로하듯 굵은 빗줄기만이 망월묘역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임 종 수 광주시청 근무 prsit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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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 2005-10-12 12:02:09
'87년 가물거리는 일자에
처음만나을때 제가 삼천포출신이라고 그렇게 좋아 했건만, 삼천포성당에서 숨어지내다가 일본으로 밀항준비를 한적있다고.....
여수 중앙로타리에서 한참 전두환정권 물려가라고 민주화운동을 할적에 생각이 많이 납니다.... 서시장 안쪽에 있는 대포집 막걸리 마시면서 시위를 코치해 오면서.....,
관문동에서 한계레신문 초대 지국장 사무실을 쳐려놓고 좋아할때......,
신기동에서 풀무원샘물과 식품장사 한다고 땀흘리고 다닐때......,
상사땜 아래에서 방울토마토가 돈이 될거라고 비밀하유스 설계존 해달라고 우리사무실에서 한참 있을때......,
돌풍으로 하우스가 날아가버려서 방울토마토사업이 실패했을때......,
석창사거리 탱자나무집에서 보신탕 장사를 할 적에 동생 개고기 내장 좋아한다고
많이 먹어라고 챙겨 줄적에.....,
그 성격... 대포, 믿음직, 말투,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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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정도 연락없이 지내다가 인터넷으로 고인이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이 심정
정말로 원통하고 불쌍합니다.
그때같이 살던 형수는 어떻게 되었는지....그리고 홀로된 아들의 주소라도 알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