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 탯줄…고향 가고 싶다”
“그래도 내 탯줄…고향 가고 싶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04.05.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광근 선생 ‘사상전향’ 후회 창살 밖 양심 감옥살이
67년 2월 월북도중 접선 실수로 동료 1명과 함께 체포
1심·2심 사형언도…대법서 무기징역 확정 후 22년 복역
70년 대전형무소서 미싱기술 습득…현재 미싱사로 근무


▲ 이광근선생 ⓒ김태성 기자 “그래도 내 탯줄이다. 그 미련 때문에 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이광근(60) 선생은 요즘 2차 송환희망자 명단에 이름 석자를 올려놓기는 했지만 왠지 마음에 큰 빚을 진 것만 같다. 30여년전 야수적인 폭력 앞에 굴복해 강제로 ‘사상전향서’를 쓴 것이 못내 명치끝을 짓누르는 해묵은 통증으로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그 때문에 88년 출소 이후로도 창살밖에 새로운 창살을 만들고 스스로 인고하기 힘든 ‘양심의 감옥살이’를 자처해왔다. 하지만 ‘전향’이라는 굴레가 화인처럼 새겨놓은 상처는 ‘천형’처럼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송환’문제를 꺼내던 이 선생의 눈자위로 언뜻 한 점 회한의 먹구름 같은 것이 잠깐 일었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이 선생은 2년전 ‘본인의 의지에 반해 강제된 전향은 무효’라며 사상전향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향의 불가피성에 대해 이북에서 얼마만큼 이해해 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단다. “고향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자의든 타의든 전향을 한 탓에 송환이 되더라도….”끝내 말꼬리를 흐리고 마는 것을 보면 이 선생의 마음고생이 여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선생은 오히려 전향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만큼 이북사회에서도 곱지 않게 볼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했다. 분단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주홍글씨’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 가슴 한끝이 답답해진다. - 67년 스물 두 살의 나이에 공작원으로 남파 ▲ 이광근 선생
이 선생은 1945년 10월17일 평양에서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인민학교에 다니던 이 선생의 어린 시절은 온통 전후복구에 얽힌  기억밖에 없다. 벽돌 한 장이라도 들 수 있었던 사람은 모두 복구작업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벽돌 한 장, 기와 한 장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B-29 폭격기 540대를 동원해 이북 전지역에 융단폭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또 “전쟁스파이들이  북한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고  소문을 내 1·4후퇴  당시 500만명 이상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북의 전후복구 작업은 한마디로 인력난과 물자난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진행된 ‘고난의 행군’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은 이북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0년이 못 걸려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선생은 60년 2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65년 중앙당에 소환돼 2년 동안 이른바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67년 1월 스물 두살의 나이로 남파 됐다.  당시 이 선생의 가족은 특수공작원으로 활동하다 사망한 큰형 때문에 비교적 당성과 사상성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여느 장기수들과 마찬가지로 이 선생 가족들의 생사여부도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이 선생은 “남파 당시 부모의 나이는 환갑이었고 누나 인옥씨가 살아있다면 70살이 됐을 것”이라며 “아마도 부모형제들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전향공작 위해 유단자 5∼6명과 함께 생활


이 선생은 67년 1월 이웅수,  최봉도 선생과 함께 ‘3인1조’로  서부전선 미군 관할구역을 통과해 남으로 넘어왔다.
미군 관할구역은 가장 안전한 잠입  루트로 마음먹고 출발하면 다음날 아침 서울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해 2월 남쪽에서 임무를 마치고 되돌아가던 이들은 접선과정에서 실수로 국군에게 발각된다. 당시 조장이었던 이웅수 선생은 허벅지에 총격을 입었지만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최 선생(전주 거주)과 이 선생은 함께 체포된다. 최 선생이 잡힌 이틀 후 이 선생도 발각된 것.이들은 인천 소재 경기도 경찰국에서 조사를 받은 뒤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당시 이 선생은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며 “이제부터 운명에 맡기자”고 삶을 거의 자포자기했다고 한다.

이후 대전형무소로 이감한 이 선생은 사상전향 공작에 시달리다 70년 끝내 전향을 하고 만다.이 선생은 “당시 전향공작을 위해 장기수 1명과 유단자 5∼6명을 함께 가둬놓고 생활하게 했다”며 “그 과정에서 이북출신들이 더 악랄하게 굴었다”고 말했다.
이 선생은 또 “전향의사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폭력사범들과 같이 수감시켜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밥과 물을 주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겨울에는 바닥에 찬물을 붓고 이불까지 걷어가 버렸다”고 회고했다.
이 선생은 73년 11월3일 동료 30여명과 함께 광주교도소로 이감됐으며 88년 12월21일 22년 긴 감옥살이 끝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 이광근 선생
- 문광자씨와 인연…세살살이 곧잘 적응


이 선생은 22년 감옥살이 끝에 노역을 통해 모은 돈 360만원을 가지고 갑자기 세상 속에 던져졌다. 이 선생은 그때를 “태평양 위에 떠 있는 낙엽신세”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 선생은 다른 장기수들과는 달리 순탄하게 세상살이에  곧잘 적응했다. 그것은 80년 5·18직후 법무부 신앙교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동명교회 집사였던 문광자 드맹 의상실 원장과 만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선생이 88년  출소해 일가붙이는커녕 집도절도 없이 떠돌던 시절 문 원장이 같이  일을 하자며 선뜻 손을 내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70년 대전형무소 수감 때부터 출소할 때까지 배웠던 미싱기술이 단단한 이음새가 됐다.


이 선생은 “88년 출소 후 의상실을 찾았더니  문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며 선뜻 일을 같이 하자고 했다”며 “대한민국에서 사상범이라면 쉽게  받아주지 않는데 은인과도 같은  매우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이 선생은 현재 드맹 의상실서 4년째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이 선생은 또 지난 3월4일 10년 동안 밥만 먹고 잠만 자던 외딴 골방에서 벗어나 방과 입식부엌을 갖추고 채광도 잘되는 2층에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이제 결혼만 하시면 되겠다”고 물었더니 이 선생은 “나보다 나이 드신 많은 분들도 결혼해서 잘 사는데 제일 어린 나만 결혼을 못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선생은 또 송환과 관련, “솔직히 1차 송환이전까지만  해도 돌아갈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사회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자의든 타의든 사상전향을 한 것에 대해 북이 관용적으로 받아 줬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