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근 선생 ‘사상전향’ 후회 창살 밖 양심 감옥살이
67년 2월 월북도중
접선 실수로 동료 1명과 함께 체포
1심·2심 사형언도…대법서 무기징역 확정 후 22년 복역
70년
대전형무소서 미싱기술 습득…현재
미싱사로 근무
당시 평양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벽돌 한 장, 기와 한 장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B-29 폭격기 540대를 동원해 이북 전지역에 융단폭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또 “전쟁스파이들이 북한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고 소문을 내 1·4후퇴 당시 500만명 이상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북의 전후복구 작업은 한마디로 인력난과 물자난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진행된 ‘고난의 행군’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은 이북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0년이 못 걸려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선생은 60년 2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65년 중앙당에 소환돼 2년 동안 이른바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67년 1월 스물 두살의 나이로 남파 됐다. 당시 이 선생의 가족은 특수공작원으로 활동하다 사망한 큰형 때문에 비교적 당성과 사상성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여느 장기수들과 마찬가지로 이 선생 가족들의 생사여부도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이 선생은 “남파 당시 부모의 나이는 환갑이었고 누나 인옥씨가 살아있다면 70살이 됐을 것”이라며 “아마도 부모형제들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전향공작 위해 유단자 5∼6명과 함께 생활
이 선생은 67년 1월 이웅수, 최봉도 선생과 함께 ‘3인1조’로 서부전선 미군 관할구역을 통과해 남으로 넘어왔다.
미군 관할구역은 가장 안전한 잠입 루트로 마음먹고
출발하면 다음날 아침 서울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해 2월 남쪽에서 임무를 마치고 되돌아가던 이들은 접선과정에서 실수로 국군에게
발각된다. 당시 조장이었던 이웅수 선생은 허벅지에 총격을 입었지만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최 선생(전주 거주)과 이 선생은 함께
체포된다. 최 선생이 잡힌 이틀 후 이 선생도 발각된 것.이들은 인천 소재
경기도 경찰국에서 조사를
받은 뒤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당시 이 선생은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며 “이제부터 운명에
맡기자”고 삶을 거의 자포자기했다고 한다.
이후 대전형무소로 이감한 이 선생은 사상전향 공작에
시달리다 70년 끝내 전향을 하고 만다.이 선생은 “당시 전향공작을 위해 장기수 1명과 유단자
5∼6명을 함께 가둬놓고 생활하게 했다”며
“그 과정에서 이북출신들이 더 악랄하게 굴었다”고 말했다.
이 선생은 또 “전향의사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폭력사범들과 같이 수감시켜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밥과 물을 주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겨울에는 바닥에 찬물을 붓고 이불까지 걷어가
버렸다”고 회고했다.
이 선생은 73년 11월3일 동료 30여명과 함께 광주교도소로 이감됐으며 88년 12월21일 22년 긴
감옥살이 끝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 문광자씨와 인연…세살살이 곧잘 적응
▲ 이광근
선생
이 선생은 22년 감옥살이 끝에 노역을 통해 모은 돈 360만원을 가지고 갑자기 세상 속에 던져졌다.
이 선생은 그때를 “태평양
위에 떠 있는 낙엽신세”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 선생은 다른 장기수들과는
달리 순탄하게 세상살이에 곧잘 적응했다. 그것은 80년 5·18직후 법무부 신앙교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동명교회 집사였던 문광자 드맹
의상실 원장과 만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선생이 88년 출소해 일가붙이는커녕
집도절도 없이 떠돌던 시절 문 원장이 같이 일을 하자며 선뜻 손을 내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70년 대전형무소 수감 때부터 출소할 때까지 배웠던 미싱기술이 단단한 이음새가 됐다.
이 선생은
“88년 출소 후 의상실을 찾았더니 문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며 선뜻 일을 같이 하자고 했다”며 “대한민국에서 사상범이라면
쉽게 받아주지 않는데 은인과도 같은 매우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이 선생은 현재 드맹
의상실서 4년째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이 선생은 또 지난 3월4일 10년 동안 밥만 먹고 잠만 자던 외딴 골방에서 벗어나 방과
입식부엌을 갖추고 채광도 잘되는 2층에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이제 결혼만 하시면
되겠다”고 물었더니 이 선생은
“나보다 나이 드신 많은 분들도 결혼해서 잘 사는데 제일 어린 나만 결혼을 못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선생은 또 송환과 관련, “솔직히 1차 송환이전까지만 해도 돌아갈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사회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자의든 타의든 사상전향을 한 것에 대해 북이 관용적으로 받아 줬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