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집으로 세들어 가던 날, 친구엄마는 여자답지 않게 엄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숨쉬기 어렵게 짓눌렀다. 짧은 커트머리에 칼날처럼 날을
세워 다려 입은 체크바지. 한 손은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손칼질을 하며, 단정하게 끊고 맺는 말씨와 똑똑이 뚝뚝 떨어지는 음색.
울 엄니 왈 “똑녀 났네!” 동네사람들은 그녀를 “여반장!”이라고 불렀다. 울 엄니도 한 깔깔하는 양반인지라 그녀와 틈틈이 다투었지만 “내가
당신 아들 심성 봐서 참는다”며, 그 집에서 추접스럽게 초라한 가난을 처먹으며 손바닥만한 단칸방에서 10여년이나 눌러 살았다.
지겨운
가난에 그대로 찌들린 채, 그 앞 골목길에서 또 10여년 박혀 살면서, 그 친구의 엄마 곁을 스쳐가는 여러 여인들을 보았고, 그 꼬방동네 어린
친구들은 대부분 불량청년으로 자라서 세월따라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동성연애는 꼬방동네의 초라한 가난 틈새로 숨어든 게 아니라, 자못 인텔리젠트하여
우아하고 품격있어 보였다. 내 친구와 친구엄마는 그 시절에 해피하지 못했고 지금 해피엔딩하고 있지도 못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헤피엔딩을 예비하는
갈등이 이어지고 마침내 해피엔딩하고야 만다. 생활이 인텔리젠트하면 동성연애도 인텔리젠트한 걸까?
이 영화는 “동성연애도 또 하나의 사랑이다.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잘못이거니와 혹시나
역겹게 느끼는 건 무지막지한 마초들에 지나지 않으니, 행여 동성연애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역겹게 느끼지 말라”며 ‘계몽’한다. 그것도 우아한
품격을 깔고 쿨한 위트를 곁들여 다가서니, 동성연애에 이질감이나 혐오감을 내 보이는 건 결코 우아하지 못하고 쿨하지도 못한 ‘돌쇠’가
된다.
▲ 엄마는 여자를좋아해 | ||
그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자기 어머니이니 이해하는 쪽이든 못하는 쪽이든 남다를 것이다. 그 리얼한 심리를 파고들고픈 호기심이 없지
않지만, 내 호기심을 채우려고 그의 심장을 후벼팔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직도 힘들게 살고 있다. 그 동안 그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는 게
죄스럽다. 그를 만나야겠다. 그에게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고 따둑거리기엔
사치스럽다.
김영주(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