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엄마가 여자를] 좋아한다면, 여러분은?
자기[엄마가 여자를] 좋아한다면, 여러분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4.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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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영화칼럼니스트]

▲ 엄마는 여자를좋아해 미야자끼 하야오의 [라퓨타 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너무나 좋아해서 비디오로 열 번 넘게 보았지만, 영화관의 장대한 화면에서 만나 그 스펙타클한 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상영하는 곳이 없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참 딱하다. 맥라이언의 변신을 보고 싶어 [인터컷]을 보았으나, 김빠진 범죄스릴러였다. 맥라이언의 변신은 대단했다. 광주극장의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가 괜찮아 보였다. 깔끔하고 산뜻했다. 내 친구 엄마도 여자를 좋아했다. 우리 식구는 그 친구 집에서 10여년을 세들어 같이 살았기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 친구는 품성이 너무나 곱고 나이도 같아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요 10년쯤 통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를 나의 진짜 친구로 여긴다. 뼈속까지도 서로 알고 살펴주는 그런 친구. 그 친구에게 얼핏 스쳐가는 어두운 그늘을 그저 ‘홀어머니 집안’의 슬픔으로 알았다. 트랜스젠더나 동성연애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마치 있지도 않은 인어이야기나 귀신이야기처럼 꾸며댄 걸로 여겼다. 귓가로 흘려듣고 말다가, 스무살이 익어가면서 그게 꾸며댄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있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언젠가 “아하!”하는 순간, 그 동안 까마득히 잠겨서 빛이 바랜 필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그 이상스러웠던 일들이 모두 화들짝 깨어났다. 그래서 그 때 그게 그렇게 그렇고 그랬구나! 그리고는 그 친구 얼굴에 스치던 어두운 그늘이 더욱 깊게 내 가슴으로 져며 들어왔다. ▲ 엄마는 여자를좋아해

그 친구집으로 세들어 가던 날, 친구엄마는 여자답지 않게 엄한 카리스마를 풍기며 숨쉬기 어렵게 짓눌렀다. 짧은 커트머리에 칼날처럼 날을 세워 다려 입은 체크바지. 한 손은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손칼질을 하며, 단정하게 끊고 맺는 말씨와 똑똑이 뚝뚝 떨어지는 음색. 울 엄니 왈 “똑녀 났네!” 동네사람들은 그녀를 “여반장!”이라고 불렀다. 울 엄니도 한 깔깔하는 양반인지라 그녀와 틈틈이 다투었지만 “내가 당신 아들 심성 봐서 참는다”며, 그 집에서 추접스럽게 초라한 가난을 처먹으며 손바닥만한 단칸방에서 10여년이나 눌러 살았다.
지겨운 가난에 그대로 찌들린 채, 그 앞 골목길에서 또 10여년 박혀 살면서, 그 친구의 엄마 곁을 스쳐가는 여러 여인들을 보았고, 그 꼬방동네 어린 친구들은 대부분 불량청년으로 자라서 세월따라 뿔뿔이 흩어져 갔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동성연애는 꼬방동네의 초라한 가난 틈새로 숨어든 게 아니라, 자못 인텔리젠트하여 우아하고 품격있어 보였다. 내 친구와 친구엄마는 그 시절에 해피하지 못했고 지금 해피엔딩하고 있지도 못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헤피엔딩을 예비하는 갈등이 이어지고 마침내 해피엔딩하고야 만다. 생활이 인텔리젠트하면 동성연애도 인텔리젠트한 걸까?
이 영화는 “동성연애도 또 하나의 사랑이다.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잘못이거니와 혹시나 역겹게 느끼는 건 무지막지한 마초들에 지나지 않으니, 행여 동성연애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역겹게 느끼지 말라”며 ‘계몽’한다. 그것도 우아한 품격을 깔고 쿨한 위트를 곁들여 다가서니, 동성연애에 이질감이나 혐오감을 내 보이는 건 결코 우아하지 못하고 쿨하지도 못한 ‘돌쇠’가 된다.

 

   
▲ 엄마는 여자를좋아해
무지개 빛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자는 물결이 몰려오고 있다. 나는 내 나름으론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남의 다양한 스타일을 인정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동성연애는 아무리 이해보려고 애써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겨우 “아마 체질적으로 그렇게 타고 나면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다”는 정도이다. 제법 재미도 있다. [그녀에게]의 여주인공이 둘째딸로 나오는데, 얼굴만 예쁜 배우가 아니다. 엄마 애인의 연기도 튀지 않고 은근하다. 체코 프라하의 거리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눈뜨고 볼 수 없는 광주의 거리에 지칠대로 지쳐서인지, 그런 곳에 산다는 자체가 탱탱 굶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떠나고 싶었다.

그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자기 어머니이니 이해하는 쪽이든 못하는 쪽이든 남다를 것이다. 그 리얼한 심리를 파고들고픈 호기심이 없지 않지만, 내 호기심을 채우려고 그의 심장을 후벼팔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직도 힘들게 살고 있다. 그 동안 그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는 게 죄스럽다. 그를 만나야겠다. 그에게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고 따둑거리기엔 사치스럽다.
                                                                                       김영주(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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