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돌'의 미학
억겁의 세월이 빚어낸 '돌'의 미학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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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 산이야기(31)-황매산 모산재(767m 경남 합천)>

거창에서 황강을 따라 달리는 길이 운치 있다. 산과 산 사이를 뚫고 흐르는 강은 주변에 좁은 논밭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주로 산과 어울려 있다. 그러다가 물 흐름이 없어지면서 호수의 모습으로 변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합천호에는 산봉우리들이 물위에 떠 있다. 호반으로 난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물위에 떠 있는 산들이 우리에게로 달려온다. 호반에는 댐이 막아지기 전부터 있었던 다랑논과 마을들이 소박한 정경을 드러내준다.

산은 부드러움을 벗고 점차 바위봉우리로 변해간다. 바위산을 이룬 악견산과 금성산이 눈앞에 다가오고, 길은 점점 깊은 산골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진흙으로 빚어놓은 듯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산 하나를 만난다. 모산재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산재를 소개하면서 돌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겠다고 설명을 할 때만 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일행들의 눈망울이 커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산행, 아름다운 세상

세월이라고 하는 조각가는 이곳의 무뚝뚝한 바위를 다듬어 여러 가지 형상의 조각품을 만들었다. 고래모양으로 빚어놓기도 하고, 부처님 형상을 창조해 놓기도 하였다. 거북이 승천하기도 하고, 두꺼비가 기어가기도 한다. 구멍이 뚫어져 통천문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있는가 하면, 죽순처럼 솟은 모양도 있다.
“여보, 저 건너편 바위들이 꼭 금강산 만물상 같아요.”
“정말 그러네.”
아내의 감동에 나 역시 동의를 표한다. 누구보다도 이런 바위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여러 가족이 산행을 하고 있는 터라 아이들의 반응도 중요한데, 어여쁜 바위들을 바라보는 아이들 모습이 즐거워 보이니 산행을 안내하는 나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마치 바람에 활짝 펼쳐진 돛과 같은 모양을 한 황포돛대바위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벼랑 위에서 휘날리고 있다. 모산재라고 하는 거대한 함선을 이끌고 가는 깃대 역할을 하는 황포돛대바위에 기대어 서서 저 아래로 펼쳐지는 넓은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은 아름답게 보는 자에게는 아름답게, 누추하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누추하게 보이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산행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위함이다.

천하명당이라고 하는 무지개터에서 잠시 소나무 숲길을 지나니 모산재 정상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황매산과 거친 바위 봉우리 아래로 드넓게 펼쳐지는 철쭉군락지가 몇 년 전 만개한 철쭉밭에서 황홀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주변의 산들이 푸른 하늘 아래서 깊고도 깊은 맛을 드러낸다. 정상주변에는 산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황매산성이라 불리는 이 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의 근거지로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의 기상

나무 한 그루 없이 바위로만 이루어진 긴 능선을 따라 가는데, 푸른 하늘과 누르스름한 바위의 색상이 대비를 이룬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자 부드러운 솔숲이 등장하면서 국사당이 나온다. 국사당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기도하였던 곳으로 지방관찰사로 하여금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3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철 지난 억새가 밝은 햇살에 반짝인다. 그 너머로 영암사터와 그 동안 함께 해온 모산재의 바위들이 현란하다. 모산재의 병풍 같은 바위들이 삼층석탑(보물 제480호)과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뒤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절집의 위치선정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불교적인 용어를 선택하지 않고 신령스러운 바위를 끌어들여 영암사(靈岩寺)라 했을 것이다.

저 화려한 바위들이 영암사터에 모아지고, 영암사터는 그 화려함을 모아 부처의 향기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영암사지의 묘미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쌍사자석등에 있다. 삼층석탑 위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쌍사자석등을 앉혔다. 그것도 가운데 부분을 철(凸)자형으로 돌출 시켜 석등을 올려놓았다. 이러한 배려 때문에 쌍사자석등은 뒷산의 억척스러운 바위들을 호령하는 듯한 기상을 갖추게 되었다. 화려한 바위에 기죽지 않으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모산재의 바위라고 하는 자연적인 것과 쌍사자석등이라고 하는 인공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쌍사자석등 뒷편의 금당터에도 기단과 사방의 계단, 그리고 주춧돌들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금당터에 서서 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 그리고 허허로운 절터를 바라보고 있으니 폐사지에서 느낄 수 있는 무상함 같은 것이 가슴을 파고든다. 낙엽이 지고 날씨까지 싸늘한 늦가을의 폐사지(廢寺址)에서 나는 쓸쓸하고 공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런 공허함이야말로 나를 채울 수 있는 밑바탕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사자를 안아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면서 마냥 즐거워하지만 소중한 문화재가 손상될까봐 걱정이 된다.
“얘들아, 그렇게 계속 만지다가 사자에게 물리면 어쩌라고 그러냐?”










▷산행코스
- 제1코스 : 주차장(10분) → 황매정사(1시간) → 모산재(30분) → 순결바위(50분) → 영암사지(10분) → 주차장 (총 소요시간 : 2시간 40분)
- 제2코스 : 주차장(10분) → 영암사지(1시간) → 모산재(30분) → 철쭉군락지(1시간) → 황매산(30분) → 중봉(40분) → 하봉(1시간 20분) → 두심마을 (총 소요시간 : 5시간 10분)
▷교통
- 88고속도로 거창나들목에서 1089번 지방도로를 따라 합천호를 끼고 달리면 대병면소재지에 이른다. 대병면소재지를 지나 첫 번째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가다보면 황매산군립공원 매표소가 있고, 여기를 지나 계속가면 영암사지 입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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