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용서와 화해를 기원하는 회소곡”
■화제의 책-“용서와 화해를 기원하는 회소곡”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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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 대한 복권 통해 적극적인 해원의 몸짓 모색

소설 ‘회소곡’은 한국전쟁과 분단이 구조화시킨 비극적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과 분단이 가족 구성원들의 내면에 화인처럼 새겨놓은 상처들은 외부를 향할 때 일사불란하게 ‘철저한 방어기제’를 보여주지만 내부를 향해서는 ‘폭력적 공격성’이라는 얼굴로 표변하곤 한다.

소설 속의 ‘나’(조병주)는 버젓하게 아버지가 있으되 ‘그 사람’이니 ‘누구 아들’이라는 형해화 된 상징으로만 남은 ‘그 사람’의 아들’이자 ‘서방 죽은 지 일년도 안돼서 핏덩어리 자식을 팽개치고 즈그 서방을 고발한 사내놈하고 배를 맞춰 도망을 친, 개 같은 년’을 어머니로 두고 있다.

특히 ‘전쟁에서 진 쪽의 편에 섰던 사람의 자식’이었던 나는 ‘하소연 할 곳’도 ‘원망을 해본 적’도 ‘하다 못해 목놓아 울어본 적’도 없이 ‘조심조심 살아온 인생’에 익숙하다. 그것은‘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가 숙명처럼 가슴에 새겨놓은 ‘주홍글씨’라는 수인의 언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란 단어 역시 ‘일반적인 모성의 상징’이 아닌 ‘비정의 대명사’이자 ‘미움과 원망의 표적’으로 ‘결코 상종해서 안 될 존재’이자 ‘배반의 언어’였다. 그것은 ‘운명을 말하면서도 개인의 운명을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지 않았’던 ‘나’에게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서로 죽이기 위해 전쟁을 하고 한쪽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던 세상’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보다는 사회적 또는 시대적 상황에 더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 ‘나’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화해는 서서히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길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조부모의 감정적인 분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조합된 ‘음모와 억측, 무지와 오해가 합작으로 만든 비극’일지라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겨우 사물을 분별하는 나이 때부터 키워 온 한’이라는 것이 ‘용서라는 이름으로 어느 한 순간 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해자를 모르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용서는 약자의 넋두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일강댁과 만남은 그 같은 인식을 바꾸는 일대 계기가 됐다.
‘일강은 우리 준영이 아부지가 나한테 지어 준 호라네. … (일강)상회 이름은 말하자면 우리 준영이 아부지가 살았으면 보고 찾아오라는 문패였어.’
일강댁의 이 같은 고백은 ‘나’에게 ‘어머니는 내 가슴에 숨어서 흐른 강’이자 ‘악보 없는 그리움의 노래’였음에도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던 회한의 세월’을 살았음을 자각케 한다.

특히 ‘나’는 어머니의 낡은 가방에서 ‘얼굴을 잃어버린 약혼 사진’과 ‘소명암판 크기의 인물사진’ 그리고 ‘500원짜리 지폐 열장’ ‘테이프’ 등의 소지품을 확인함으로써 감정을 잃고 침묵을 강요 당해왔던 ‘어머니의 한’과 비로소 대면하게 된다.

‘순결한 영혼은 누군가에게 우롱 당하고 마침내 빈 몸뚱이만 남은 어머니’와 ‘담겨 있던 물건은 털리고 짐작하기 어려운 사연만 남은 채 주인 곁으로 되돌아온 가방’은 그야말로 닮은꼴이었던 까닭이다.

어찌 보면 ‘낡은 가방’은 ‘어머니의 인생’에 다름 아니고 ‘가방 속 소지품’이야말로 ‘어머니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했던 기억’을 보여주는 메타포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나’는 ‘항상 부모로 인한 피해자’에서 ‘어쩌면 내가 어머니에 대해 더 가혹한 가해자’였다는 구체적인 반성에 이르게 된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다는.’

그것은 ‘항구를 떠난 배들도 가끔은 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 때문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의 승인으로 이어지고 ‘추상적인 모성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 때문에 남모르게 사모곡을 부르면서도 한사코 현실 속의 어머니를 과녁 삼아 원망의 활시위를 당겼던 나’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쯤해서 소설은 용서와 화해를 향한 막바지로 치닫는다.
‘어머니의 절망’ 이를테면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만날 수 없는 부모’ 때문에 ‘혼자 망향가’를 부르며 ‘모습을 감추고 진실을 숨기고 흐르는 강물에 떠가는 부평초처럼 살았을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해원은 아직 미완이다.
‘나’의 변화는 이제 첫 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 누군가를 용서하고 말고 하는 마음’보다 ‘어쩔 수 없는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소극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서다. 그래서 구체적인 해원을 위한 ‘나’의 씻김굿은 ‘어머니를 조씨 문중의 며느리로 또 나의 어머니로 복권’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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