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한 서린 죽도를 품은 산
정여립의 한 서린 죽도를 품은 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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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 산이야기(26)-천반산(647m·전북 진안·장수)>


1589년(선조 22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린 한 장의 비밀보고서는 1천여 명의 선비가 처형되거나 유배당했던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보고서에는 전주를 거점으로 정여립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즉시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의금부 도사를 급파하였지만, 이 사실을 감지한 정여립은 전라북도 진안의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이기에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주자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당시의 풍토에서 절대군주론을 부정한다든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정여립은 급진적인 개혁론자인 셈이다.

금강이 만든 육지 속의 섬, 죽도

천반산 북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죽도는 삼면을 강물이 휘감고 돌아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정여립의 한이 서려있는 죽도와 천반산을 찾아가는데 그 때의 아픔을 슬퍼하는 듯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금강 상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 북동쪽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장수읍과 장계면, 천천면을 지나면서 제법 강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아직은 연평천으로 불리지만 잠시 후 죽도에서 무주 덕유산 쪽에서 흘러나온 구량천과 만나 금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다. 바로 죽도는 이 두 강이 휘돌면서 만들어낸 육지 속의 섬이다.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막교 다리에서 바라본 강의 풍경에 넋을 잃는다. 강에서 솟구쳐 오른 절벽은 굽이쳐 흘러오는 맑은 물줄기를 감싸고, 여울을 지난 강물은 아름답게 솟은 바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잠시 물길을 멈춘다. 그리고 나서 죽도를 만나러 다시 여울을 이루며 갈 길을 서두른다. 키 작은 활엽수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여울을 흘러가는 물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빗소리에 멈춘 매미들의 울음을 대신하여 새들이 노래를 한다.

산·강·들·마을이 만든 아름다움

한림대터에 올라서자 운무로 덮였던 연평천과 주변의 모습이 살며시 드러난다. 연평천의 하얀 물방울을 만들며 흐르는 여울이 거침없고, 그 위를 날아가는 흰 학이 고고하다. 곡선을 그린 산줄기와 구불구불 흘러가는 물줄기 사이에 푸릇푸릇한 논이 자리잡고, 새록새록 마을이 앉아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풍경이다. 이런 풍경 속에 한국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는 자연과 함께 해왔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소박하고 정겨운 삶이 형성된 것이다.

서쪽 멀리 보여야할 마이산의 쫑긋한 모습이며, 운장산·구봉산 같은 진안의 명산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옛날 선비들은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학문을 논하고, 도를 논하였을 것이다. 정여립이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시킬 때 망루로 활용했던 곳도 바로 한림대터다.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정여립이 사용했다는 성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뻗은 줄기를 타고 가면 죽도에 닿는다. 이 줄기에는 정여립이 군사를 조련할 때 뛰어다녔다는 뜀바위가 있다. 그 때 사용했던 거대한 돌솥이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자욱한 안개가 잠시 옷을 벗어주니 북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구량천과 장전마을, 그리고 건너편의 첩첩한 산들이 깊은 산골을 이룬다. 암릉길을 잠시 지나니 멋진 노송 한 그루와 전망바위가 기다리고 있다. 남쪽의 연평천과 주변의 산줄기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긴다. 안개가 끼었다 벗었다 하는 모습이 신비로움까지 더해준다.

정상의 멋은 폐쇄된 공간이 사방으로 한꺼번에 터지면서 맛보는 해방감인데, 천반산 정상은 나무가 가려 전망이 터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오늘은 비까지 오는 날씨라 나무 너머로 보여야할 덕유산 줄기마저도 볼 수가 없다.
가막교로 하산을 하면서 대동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을 생각한다. 정여립이 이루지 못한 꿈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산행코스
-. 제1코스 : 가막교(1시간) → 성터(40분) → 정상(1시간 20분) → (먹개골 경유) 가막교 (총 소요시간 : 3시간)
-. 제2코스 : 장전마을(1시간) → 정상(30분) → 성터(1시간) → 죽도 (총 소요시간 : 2시간 30분)
▷교통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장수나들목을 빠져 나와 장계면소재지를 지나 26번 국도를 따라 진안 쪽으로 달리다보면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지점인 방곡재에 이른다. 방곡재에서 진안쪽으로 몇 분만 달리면 오른쪽으로 가막리로 우회전하는 이정표가 있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강이 보이고 가막교 다리에 닿게 된다.
-. 진안버스터미널에서 가막리행 군내버스가 1일 6회 운행된다. (산행전문 자유기고가)
www.chosu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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