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이곳, 여기는 함양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이곳, 여기는 함양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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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눈 앞에 있는 백운산 자락에 구름이 가득하다. 바람이 분다. 담 옆의 나무가 그 결에 따라 몸을 흔든다. 여름이 지나 어느새 가을이다. 마을에는 감이랑 밤이 주렁주렁하다. 미처 이름을 모르는 풀과 꽃들, 나를 바라본다. 여름에는 접시꽃이 한창이더니 얼마 전부터는 나팔꽃이 피어있다. 벌들은 바지런히 꿀을 찾아다니고, 평생 땅 파는 농사꾼님들은 바삐 움직인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햇빛 짱짱하면 또 그런대로… 게으름 피우는 놈은 동네 개뿐인 듯 하다. 그 개와 놀아줄 아이들도 없는 벽촌산골, 운산마을. 바로 내가 사는 곳이다. 백운산 자락의 비탈진 마을. 적당히 외지고 한적하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 있는 양지 바른, 수차례의 역사적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보호를 받았다는 청명한 곳이다.

눈만 들면 온통 나무와 흙이다. 하늘아래 이리 산이 많았던가. 산 아래, 작은 집과 논밭. 말 그대로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다. 조금이라도 인위적인 것이 있을라치면 눈에 걸린다. 자연의 것이 아니라서 아름답지 않은것인가.
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집은 개량된 형태의 본채와 아궁이 흙집인 아래채에 작은 텃밭과 장독대가 있는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다섯평 정도의 텃밭은 나의 역량에 딱 맞아 부담스럽지 않다. 씨 뿌리고 길러보았던 적이 없는, 있으면 있는대로 무심히 지나쳤던 나에게 텃밭은 말을 걸었다. ‘나랑 재미있게 놀아보지 않을래?’

2년가량 비어있던 집 쓰레기를 치우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평생 처음 잡아본 호미로 이리저리 파고 있으니 손가락 두께만한 지렁이가 꿈틀댄다. 흙이 참 푹신하다. 그래 상추부터 심어보자. 씨앗을 손에 올려보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작다. 이 여린 것이 싹을 틔우고 자란단 말이지. 하긴 그 작은 도토리에서 그렇게 큰 나무가 나오는데…내친김에 무우랑 당근이랑 열무도 심는다. 며칠 지나니 정말 싹이 올라온다. 신기하다. 그러더니 비 한번씩 오고나면 쑥쑥 자란다. 놀랄 정도다.

원래 밭에 있었던지 어성초가 고개를 내민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씨를 뿌린지 한달이 지난 지금, 제법 자란 열무 잎과 무우 잎을 보니 나 스스로가 장해 보인다. 사실 한 것도 별로 없는데… 촘촘하게 모여 있는 그 이파리를 솎고선 그 생명력을 나는 받아들인다. 맑은 공기, 짱짱한 햇빛을 온몸 가득 받아들인 그 몸이 내 몸과 하나 될 때, 나는 감사한다. 나의 몸과 마음을 살려준 것에, 그러면서 나 역시 세상을 살려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늘상 풀벌레, 새소리로 가득한 우리집은 음악이 따로 필요 없다. 밤은 정말 밤이다. 어떤 만들어진 소리도, 불빛도 없이 조용하고 깜깜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작게만 들리던 풀벌레 소리는 아예 오케스트라 연주가 된다. 어둡기만 하던 밤하늘은 온통 별 밭이 된다. 평상에 누워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별을 바라보면 내 마음은 우주를 날아다닌다. 한 없이 넓고 광활한 우주. 깊은 산골 우리집에서 나는, 우주를 만난다. 땅위의 일들이 한없이 하찮다. 집착하고 욕심냈던 일들이 하나씩 보이면서 나는 비운다. 그리고 그만큼 채워진다. 평화로움으로….

이곳에서 나는 느리게 살아간다. 조금만 움직이고 조금만 먹는다. 농번기, 이웃이 바삐 움직이는 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좀 쉬련다. 나에겐 버거운 일들에 그동안 숨 가쁘지 않았던가. 나를 들여다보며 받아들이며, 못마땅했던 나의 모습이 이제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점점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 진정 나를 사랑할 때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터. 이곳의 삶은 그것을 위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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