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0시에 출근하는 여자”
“저는 10시에 출근하는 여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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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재학 시절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해 조직생활 11년 차인 아줌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뒀다. 갓난아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친구들은 “애 다 키웠네”하며 부러움을 내보이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 아이는 자라는 중”이라고 답변한다. 아이가 3학년이건 유치원생 이건 아니면 갓난아이 건간에 매일 매일 다른 상황의 육아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아직 풀지 못한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방목하는 편이다. 맞벌이 부부라 꼼꼼하게 챙겨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2년 전에 있었던 일이 그 이유가 됐다. 2년 전 11월초.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때였다. 그 당시 남편은 육아문제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고 그 날도 8시쯤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약속의 전화를 남겼지만 결국 10시가 다돼 아이를 찾아갔다.

그런데 아이가 쉴새없이 전화를 걸어 “엄마, 아빠 술 많이 드셨어. 지금 아빠 주무시는데 나 무서워. 목도 아프고”하며 훌쩍였다. 가슴이 미어지지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벽 3시쯤 일이 끝나 집에 도착했다.

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숨소리가 이상했다. 아들 녀석의 이름을 불렀더니 이상한 목소리로 “엄마, 물 줘”한다. 가져다 준 물을 먹던 아이가 갑자기 컵을 떨어뜨리고 얼굴이 새파래진다. 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우고 119를 부르는데 아이의 몸이 자꾸 오그라들었다. 다행이 빨리 도착한 119 덕분에 응급조치를 하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의사들이 달려오고 피 뽑고, 엑스레이 찍고 아이는 계속 헛소리를 하고….

호흡치료를 받고 나서야 아이의 얼굴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알러지성 급성후두염이라고 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호흡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며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아이는 한번 더 응급실 신세를 졌고 지금도 가끔 가벼운 감기 증상만 보여도 우리 부부는 병원에 달려가느라 정신이 없다.

이 일이 있은 후 우리 부부는 아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받아쓰기 10점을 받아와도 소풍만 다녀와도 제 물건 한 두개씩을 꼭 잃어버리고 와도 “담엔 좀 잘해보자”라는 말로 대신하곤 했다. 물론 학년이 올라가면서 스스로 낮은 점수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좀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을 스스로 갖게 돼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슬슬 이 녀석이 걱정되던 터였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아침밥도 출근전쟁 걱정 덜어
“야근많아도 재량권 주어진만큼 일만은 ‘칼’이지요”


7년간 다니 던 첫 직장에서 지금의 회사로 옮길 때 상사와 인터뷰에서 내가 요구했던 유일한 것이 바로 아침 출근시간의 자유였다. 전 직장에서 내 근무평점은 늘 D였다. 계속되는 철야 야근에도 불구하고 9시 정시출근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이만큼 인상시켜주십시오” 했더니 “넌 근무태도가 D다. 3개 평가항목 중 어느 한 곳에서라도 D가 나오면 연봉인상은 해줄 수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제가 한 달에 며칠을 야근하는지 아시는지요?” 했더니 “직장인의 기본은 출·퇴근이다. 다들 야근하고도 일찍 출근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며 일축했다.

맞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아이를 키우며 회사생활을 하는 직장인 엄마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현실이다. 그 당시 우리 아이는 어린이 집을 전전하고 있을 때였고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자는 아이 깨워 씻기고 아침밥 먹이고 옷 갈아 입히고, 어린이 집에 데려다 주고 허겁지겁 출근해도 늘 9시30분이 넘어야 회사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내 출근에 대해 재량권을 주었다. 일에 대한 책임과 함께. 그리고 나는 3년여 동안 대부분 9시30분에서 10시 사이에 출근한다. 간혹 더 늦을 때도 있다. 이젠 광고주들도 10시전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아침밥도 꼭 챙겨 먹이고 학교 가는 걸 지켜보고 전날 사놓지 못한 준비물도 여유있게 챙겨줄 수 있다.

너무 편하게 회사 다닌다는 말을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정말 치열하게 일하는 다국적 광고회사에서 근무한다. 주5일 근무기준으로 월평균 15일 이상을 야근한다. 주말도 없이 일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녁에 아이와 놀아주거나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가족의 저녁을 챙겨주는 일은 거의 하지 못한다. 대부분 남편의 몫이거나 아니면 아들 녀석의 몫이다.

아이 문제와 부딪히면 항상 당당할 수 있는 엄마는 없는 것 같다. 늘 채워주지 못하는 바쁜 엄마에게 불평불만하지 않는 아이를 볼 때면 그 마음이 더 애틋해진다. 오늘도 난 10시에 출근했다. 하지만 오늘도 야근이다. 긴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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