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혹은 갈등
죽음 혹은 갈등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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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종소리』,문학동네,2003.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물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아득한 어떤 공포이기도 하다. 수영을 하지 못해 몇 번이고 부끄런 경험을 해 본적이 있는 나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푸른 이끼들이 벽면에 포진되어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에게 다시는 나가지 못할만한 음습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던 우물은, 흡사 어떤 죽음의 그림자가 또아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으려니와 작고 야윈 몸뚱아리의 내가 들여다보기에 그 곳은 깊고 아득했던 것이다.

한 번은 우물의 물갈이를 하기 위해서 동네의 젊은 형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그 좁은 공간에서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흰자위가 가득한 눈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때 그의 눈에 투영되었을 둥글고 좁은 하늘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우물가에 모여든 어른들을 향해서 두 팔을 벌렸던 모습은 어떤 제의를 수행하는 사제의 자세같기도 했던 것이다. 이윽고 그에게 내려진 것이 동아줄에 매달린 검은 두레박이었으니 굳이 어떤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 기이한 풍경이 내게는 참으로 엄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두레박을 타고 올라오는 것들은 그렇게 제의적이거나 엄숙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내가 버린 과자봉지나 누군가 실수로 빠뜨렸을 신발 한 짝 같은 것들과 진흙이 가득찬 빈병들이 언제부턴가 우물의 밑바닥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버려졌거나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기억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의식의 깊은 곳에서 다시 움틀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신경숙의 소설에서도 그런 죽음의 그림자들이 도사리고 있다. 물이라는 이미지를 곁에 두고서 오래전부터 자연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문명의 두레박 안에 깊고도 어두운 몇 개의 그림자를 조용히 담아놓은 것이 이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몇 편의 제목들만을(「우물을 들여다보다」, 「물 속의 사원」, 「달의 물」) 보더라도, 한 편 한 편 쓸 때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지고 모르지만 『딸기밭』이후 발표한 소설들을 모아놓고 보니 물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의 무의식이 물을 몹시 그리워하거나 혹은 무서워 하고 있지는 않나. 그것은 내 유년의 우물과도 상관없지 않은 바, 부드럽게 스며드는 물에 대한 감각도 있지만 뭔가를 한 순간에 쓸어가버리는 공포로서의 물도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무의식의 깊은 심연은 어쩌면 물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경숙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물과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언제나 갈증(결핍)을 느끼고 있다. 흡사 죄악을 저지른 인간이 고행을 겪는 듯한 모습들이 곳곳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고행은 죽음과 맞닿아 있어 보인다. 그것은 속죄의 제의다.

티벳고원의 천장사가 망자의 몸을 절단한 후 독수리들에게 살점을 던져주는 모습(「종소리」)을 그리고 있는 소설에서 망자의 유가족들은 미소를 띄고 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어느 동네의 다방에서는 여주인이 거대한 수족관에 악어를 키우는 중이다(「물속의 사원」). 제의의 희생물로 바쳐질 사람이 정해지면 그날부터 악어가 가장 포악해질 때까지 악어를 굶긴다.

죽은 이의 시신을 던져주면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 치울 수 있도록 말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그 악어에 매혹되어 흡사 사제들처럼 다방 주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급기야는 귀신을 앞에 두고 조기를 굽고 국도 놔주고 수저로 같이 놓은 후에 밥을 같이 먹기도 한다(「우물을 들여다보다」). 밥상과 제사상이 같이 차려지는 것이다.

이런 섬뜩한 장면들의 풍경들에는 언제나 물이 있다. 고요하면서도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서 서서히 몸을 장악해 들어오는 그 물의 풍경에서는 언제나처럼 갈증이 느껴진다. 그 갈증은 작품의 주인공들이 겪는 결핍과 진한 죽음의 그림자들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인간들의 죄악이 깊은 수렁을 헤매이다 이 땅의 어느 상처입은 사람들이 스스로 사제가 되어 제단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혹은 그들 스스로가 희생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연과 죽음의 세계로부터 이미 한참이나 멀어져버린 우리의 내면에 작가는 언제부터 이런 섬뜩한 칼을 들이 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쯤에서 나는 신경숙이라는 작가에게 붙였던 몇 개의 수식을 과감하게 철폐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삼보일배를 하며 도심 한 복판을 걷는 일군의 사람들을 보았다. 빌딩 숲과 자동차들의 거친 매연 사이로는 햇볕이 작열하고 있었고, 그들의 입술 언저리와 목덜미에는 하얀 소금꽃이 피어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 두레박에서 이제 막 길어올린 우물물을 부어주고 싶었다. 그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도 작열하듯 타오르는 갈증의 깊은 우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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