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가 아쉬운 정치인, 김근태-'냉전세력의 집권 막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2%가 아쉬운 정치인, 김근태-'냉전세력의 집권 막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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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원이 후보단일화를 주장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
<'냉전 특권세력의 집권을 막으라는 국민 요구에 따랐을 뿐">
< 단일화 과정 김근태 행보에 서운해 한 민심에>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원칙지키는 정치인으로 남겠다">


지난 3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 지역 민주세력들은 고민이 많았다. 한국정치사를 왜곡시킨 지역구도를 깨뜨겠다는 후보를 밀 것인가, 재야민주화세력의 대표 정치주자를 밀어야 할 것인가. 노무현과 김근태 모두 소중한 개혁주자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김근태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과정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양심선언으로 인해 스스로 경선레이스에서 떠났다. 때문에 이 지역 민주세력들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경선을 관전하고 그 결과를 즐길 수 있었다. 반대로 '너무 맑은 물'을 찾고자 했던 김근태는 스스로 언론의 조명 저편으로 사라졌다.

노무현이 경선에서 1위를 했다. 그러나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패배, 그리고 8월 재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은 참패를 겪으면서 민주당 안팎에선 '노무현 가지고 대통령선거 치를 수 있겠냐'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후보단일화를 외치며 당 안팎에서 노무현 흔들기가 시작됐고, 월드컵 이후 떠오른 정몽준이 단일화교섭의 대상으로 지목됐다. 후보단일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던 철새정치인들의 이동도 잇따랐다. 노무현의 입지는 당내경선1위 당시 60%가 넘던 개인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진 만큼이나 당내에서 좁을 대로 좁아졌다.

노무현은 "더이상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을 힘이 없다"며 "국민이 뽑아준 후보인만큼 남은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세력단결을 통해 대선을 치르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때 노후보를 섭섭하게 했던 사람이 김근태였다.
민주당 안팎에서 너도나도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며 노무현 흔들기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노사모 등 노후보측은 '후보단일화는 곧 정몽준 대선후보만들기의 다른 이름'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근태마저 '단일화'를 주장하고 나선 것.

물론 김근태의 '단일화'는 여론지지율만을 쫓아 이동하는 다른 철새들의 단일화완 달랐다. '경선'을 전제로 고집했으며, '단일화를 이유로한 탈당'은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구도와 주장은 보수언론에서 "김근태도 단일화 주장"이라는 식으로 발췌 인용되는 정도 외에, 그의 온전한 고민을 드러내는데 실패했다.

김근태의 주장은 또 노무현측에게 '서운함'으로 다가갔다. 노무현측에선 정당성있는 후보자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외의 인물과 후보단일화를 하자는 주장은 결국 '정몽준으로의 단일화 아니냐'며 모든 단일화논의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애써 감추지 않았던 것.

또한 이 지역에서도 "김근태가 조금만 도와줘도 노무현이 저렇게 고생하지 않을텐데...", "왜 김근태가 정치철새들의 대열에 끼어있는가'라며 섭섭함을 나타냈다. 심지어 "상고출신에 대한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오만함 때문 아니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결국 노무현은 후보단일화에 성공했고, 지지율도 여론조사 최종발표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후보에 비해 6~9%까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으로의 후보단일화 성공과 지지율 반등은 결과적으로 김근태가 바랐던 바였고, 일부 언론에선 그의 예견성을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가받기 전까지 6.13지방선거 이후 반년 가까운 기간동안 김근태는 말 못하는 속앓이를 해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말은 했지만 언론에서 제대로 귀기울여주지 못했다. 그런의미에선지 최근 김근태의 홈페이지에는 언론플레이를 잘 못하는 그를 가리켜 '2%부족한 정치인'이라고 안타까워하는 글도 올랐다.

지난 4일 민주당 국민참여운동본부가 부산으로 옮겨 현판식을 하는 자리에서 김근태 민주당 고문을 만났다. 그는 그동안 속앓이를 해야했던 자신의 고민과 앞으로 노무현 후보의 서울시 선대본부장을 맡아 보다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털어놓았다.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는 김고문의 행보에 지역민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노후보가 3월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되긴 했지만, 지방선거와 보궐선거를 거치면서 지지율이 급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상태로 대선에 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 후보를 이길 수 있는 후보단일화과정이 필요했다.
노후보캠프측에선 단일화에 반대했다. 당시 노후보의 지지율이 정몽준 후보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민주당쪽에서는 모두가 달라붙어 노무현쪽으로 지지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쪽으로 가야 한다는데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노-정 양쪽 모두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국민들이 양쪽의 지지율을 비슷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냉전특권세력을 극복하라는 국민들의 강렬한 요구였다. 그리고 단일화가 안되면 한국정치의 미래가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양쪽의 지지율이 비슷해지면서 후보단일화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근태 의원이 후보단일화를 주장했다'는 것은 맞지 않다. 보다 큰 대의, 즉 '냉전 특권세력인 이회창 후보의 집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라는 국민의 요구에 따랐던 것 뿐이다. 결과적으로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 후보단일화가 안됐다면 지금의 선거는 없었다.


'후보단일화 주장'이후의 활동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단일화를 위해 두 가지에 힘을 쏟았다. 우선 중부 수도권에 있는 정치인들과 언론을 통해 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주장했고, 두 번째로 노-정 두 사람에게 만나라고 했다. 노후보가 받아들였고, 다시 양측의 실무협의체를 만났다. 그리고 정후보쪽이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 방법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김고문의 활동이 소극적이었다고 지적받는 이유는 뭔가

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 주장과 잇따른 일련의 요구 등 나의 발언은 언론에 다 났었다. 났는데 작은 기사로 났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진 않았었다. 그래서 일부 언론은 후보단알화가 이뤄진 다음에 '예언자 김근태, 마법사 김근태 ' 이렇게 박스기사를 썼다가, 나중에 기사가 밀렸다는 후일담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노후보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건가

당연하다. 내가 주장했던 현실적인 단일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미 제주도로 갔었고, 원주도 갔으며, 지난 일요일엔 서울 전시내를 도왔다. 오늘과 내일은 부산에서 머물면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부탁할 것이며, 서울로 복귀했다가 다시 부산에 내려올 계획이다.

김 고문을 아끼는 사람들은 여전히 기대만큼의 활동이 안보인다며 안타까워한다

아마 이런 게 아닐까. 노후보와 함께 선거운동하며 사진 찍는 모습이 왜 안보이냐, 이런 것 같다. 사진 찍는 못찌고 이런 모습이 왜 안나오냐,, 이런건데, 사진 찍히는 것이 정말 중요한 거냐. 일을 하고 여러분들이 요청하고 갈망했던 단일화만드는데 그런 역할을 하는데, 노무현을 여러분의 선택으로 대통령에 당선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하고 다닌다. 자연스럽게 사진이 찍히면 나오는 것이다.

앞으로 선거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단일화는 어쩌면 정몽준 후보의 결단으로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사건이다. 그러나 오만하면 안된다.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던 이들까지 모두 껴안고 가야한다. 단일화는 모든 국민들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계기와 동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여론조사 공표금지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앞선 것으로 나타났지만, 먼저 국민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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