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이중성에 관하여
사람의 이중성에 관하여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1.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 출신 가수이다. 올 초 're : 서른 즈음에'라는 제목의 이른바 386 세대를 위한 앨범을 발표했다. 현재 여자의 삶을 주제로 2집 음반을 준비중에 있다.>

나는 어떤 사람도 이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중, 삼중은 커녕, 대부분의 사람은 아주 다중적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참 여러 가지 마음이 있고 우리는 그 여러 가지 마음 때문에 흔히 갈등이라는 걸 한다. 갈등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내 경우를 뒤돌아보면 내 속에서 참 예쁜 마음만 꺼내 쓰게 해주는 사람이 있고 내 속에서 참 나쁜 마음만 꺼내 쓰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물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럴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야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아주 중대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흔히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양가 감정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고, 자기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다만....이러한 자신의 다중적인 모습 속에서도 어떻게 일관성 있는 삶의 자세를 견지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성찰하고 실천해야할 숙제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이해하고자 할 때 사람의 마음속엔 누구에게나 이런 다중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일 수 없으며 분명, 내 입장에서 바라본, 그 사람일뿐이다.

자신의 다중성을 인정할때 소통 수월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자기의 주관대로 다른 사람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인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이런 자세는 언젠가 반드시 자기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면 성숙한 사람일테고, 그 후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면 그나마 성숙해 가는 사람일테고, 부메랑을 맞고 나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처가 더욱 선연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것은 몹시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사명감과 내 상처에 대한 겸손함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코가 빠져 아파하던 내 상처도 결국은 이 세상의 수많은 상처들 중의 한 조각일 뿐이라는 것.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껴안고 보듬어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누군가 나에게 손내밀었을 때, 그 손을 거절하지 않을 수 있는 만큼의 따뜻한 여유와 누군가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었을 때 내 상처가 더 아파서, 남의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지 않을 수 있는 마음 하나쯤은 언제까지라도 반드시 가진 채 살고 싶다.

모든 관계의 열쇠는 내 안에
길을 선택하는 것, 자신의 다중성을 엮는 과정


누구나 남의 염병보다 자기 고뿔이 아파 보이는 법이니 물론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면 먼저 상처 입은 나 자신부터 돌아볼 일이다. 누군가 나로 하여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면 먼저 상처 입힌 나 자신부터 돌아볼 일이다.

언제나 관계의 모든 열쇠는 내 안에 들어있다. 사람마다 저마다 자신의 길이 다르다. 같은 직업을 가졌거나 비슷한 처지처럼 보여도 그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몫은 사람에게 마다 다르며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의 선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여러 갈래의 다중성을 자신이 어떻게 엮어나가느냐에 달려있다.

우리 삶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때로 길벗이거나 아니거나일 뿐이다. 그 사람을 길벗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도, 결국 내 몫일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